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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시간: (EST) 2020년 11월 25일, 수 3:20 am
[칼럼/기고/에세이] 기고
 
모범적 소수 인종, 그 부끄러운 이름에 대하여
[특별 기고] 이민사회, 개인영달 넘어서 사회제도 변혁 위해 목소리 내고 연대해야


▲ 5일 오후 4시 30분 올랜도 시청앞에서 시위대들이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 사건에 항의하며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해도 해도 너무 한다(Enough is enough)", "백인의 침묵은 경찰의 폭력과 같다(White silence=police violence)", "인종차별을 끝내라! (End racism)", "침묵은 공조하는 것이다(Silence is complience)"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날 시위에는 약 12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통금 시간인 오후 8시에 끝을 맺었다. ⓒ김명곤

(서울=뉴스앤조이) 김영봉 목사(와싱톤사귐의교회)

1.
지금 내가 사는 미국은 혼란과 위기의 늪 속에 깊이 빠져 가고 있다. 코로나19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 미국은 그동안 단편적으로 드러나던 문제들의 참담한 상태를 있는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폭동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진단을 받아 온 미국식 '카지노 자본주의'의 부조리, 그 부조리에 기생하여 자리 잡은 의료 체계의 기형과 왜곡 그리고 계층 간의 격차가 얼마나 심각한지가 드러났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 나라를 건강하게 이끌어 갈 수 있는 지도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국민의 여론과 감정은 누구도 어찌해 볼 수 없이 심하게 갈라져 대립하고 있는데, 대통령은 연일 국민의 감정을 갈라놓는 언행을 일삼고 있다.

조지 플로이드는 상황적인 측면에서 가장 좋지 않은 시점에 가장 자극적인 방식으로 죽임을 당했다. 그동안 무장하지 않은 흑인—정치적 올바름의 기준으로 하자면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표기하는 것이 좋겠지만, 흑인, 백인 그리고 동양인이라는 표현을 중립적인 의미로 사용하겠다—이 백인 경찰의 지나친 대응으로 살해당하는 일은 잊을 만하면 반복되어 왔지만, 이번 사건은 살해 과정의 잔인성에 있어서 과거의 사건들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성보다 감정에 더 지배받게 되어 있고, 감정은 보는 것에 의해 더 심하게 영향을 받는다. 한쪽 무릎으로 조지 플로이드의 목을 짓누르고 있는 백인 경찰 데렉 쇼빈의 무표정한 모습과 짓눌린 채 "Please, I can't breathe!"라고, 나중에는 "Mama, I can't breathe"라고 호소하는 조지 플로이드의 음성이 영상으로 퍼지면서 미국 시민은 분노했다.

특히 흑인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지난 3개월 동안 흑인들은 코로나19 감염증으로 심하게 피해를 봤다. 감염자들과 사망자들의 인종 분포에서 흑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흑인들의 삶의 상황이 감염에 노출될 가능성과 사망에 이를 가능성에서 다른 인종보다 훨씬 높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으로 이미 분노가 축적되고 있던 차에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이 기름을 부은 것이다.

하지만 이 분노는 흑인들에게 국한되지 않았다. 양식 있는 백인 그리고 다른 소수 인종들 중에도 "해도 해도 너무하다"(Enough)는 공감대가 신속하게 형성되었다. 조지 플로이드가 죽임당한 모습은 흑인에 대한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의 극단적인 모습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미국 시민들 사이에 "더 이상은 안 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고, 그것이 전국적인 시위로 확산되고 있다. 이 기회를 틈타서 약탈과 방화로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의 절대다수는 "이번에는 끝내야 한다"는 절박감과 간절함으로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

게다가 여러 도시에서 경찰들이 시위대의 취지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미시간에서는 민선 치안담당관 크리스 스웬슨이 사복을 입고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고, 제복을 입은 경찰들이 시위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지지와 연대를 표시하기도 했다. 댈라스의 어떤 치안 담당관은 방송에 나와 대통령의 강경 진압론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물론, 시위대와의 충돌 과정에서 또 다른 과잉 진압 사태가 일어나고 있기도 하지만, 경찰들이 시위대 취지에 공감과 연대를 표현하는 모습은 과거에 보지 못하던 광경이다. 그만큼 조지 플로이드 사건에 대한 시민 정서에 넓고 깊은 공감대가 형성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정치인들이 나와서 "저의 마음과 기도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My thoughts and prayers are with you)라고 말하면서 사태를 피해 가곤 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마음과 기도가 아니라 행동을 보여 달라"고 외치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정말 어떤 가시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빌어 본다.


▲ 5일 오후 4시 30분 올랜도 다운타운에서 벌어진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시위 참가자들이 플로이드의 잔혹한 죽음을 항의하는 뜻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 ⓒ 김명곤

2.
조지 플로이드가 질식하여 죽어 가는 영상을 보면서 유독 눈에 들어온 사람이 있다. 경찰과 군중 사이에서 서성거린 동양인 경찰의 모습이다.

그는 몽족 출신의 투 타오라는 사람인데, 이 사건 이후에 해고되었다고 한다. 사건이 지속되는 8분 동안 그는 사고 현장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군중을 제지하는 책임을 맡은 듯이 보인다. 그는 다른 백인 경찰들처럼 데렉 쇼빈의 살인 행위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 살인 행위를 묵인 내지 방조한 셈이다.

나는 그를 정죄하거나 비난하려는 마음이 없다. 소수 인종으로서 백인 주류 사회에 들어가 일하는 사람들은 다 안다. 소수 인종으로서 백인 주류의 조직 사회에서 인정받고 살아남고 발돋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소수자로서 자기가 속한 조직 사회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고 정의를 요구하는 것은 그 사회에서 축출당하는 원인이 된다. 몸담고 있는 조직 사회에서 살아남고 올라가기 위해서는 웬만한 일에 대해서는 때로 묵인, 방관 혹은 타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투 타오는 그런 생존법이 몸에 밴 사람일지 모른다. 혹은 데렉 쇼빈이 상사여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있었을지 모른다.

내가 그의 행동을 거론하는 것은 사건 현장에서 그가 보여 준 행동이 미국 사회의 흑백 갈등에서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역사적 위치에 대한 상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흑인들의 역사는 400년이 넘지만, 동양인들의 역사는 1850년부터 철도 건설과 다리 건설 같은 기간산업을 위해 중국인 노동자들을 데려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중국 이민자들은 반세기 만에 미국 정착에 성공했고 번영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백인들은 1882년에 '중국인 제외법'(Chinese Exclusion Act)으로 대응했다. 더 이상 중국인을 데려올 수 없자 미국 상인들은 일본과 한국, 필리핀 등지에서 노동자들을 데려왔고, 그들이 정착한 곳에서 번성하면 또 다른 법으로 권리를 제한했다.


▲ 5일 오후 4시 30분 올랜도 시청앞에서 약 1200명의 참가자들이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 사건에 항의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는 가운데 한 시위 참가자가 “To remain silent is to be complicit(침묵하는 것은 동조하는 것이다)라고 쓰인 피켓을 분수대 옆에 놓아두고 있다. ⓒ김명곤

동양인 이민자들은 처음부터 흑인들과 동일하게 차별과 제한과 박해를 경험했다. 하지만 동양인들은 대부분 더 나은 삶을 위해 가난에 찌든 조국을 제 발로 떠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방인으로서 미국 땅에서의 차별과 제한과 박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제도적 억압과 차별에 대해 저항하기보다는 순응했고 협조했고 헌신했다. 평등한 대우를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지 않고 혜택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했다. 게다가 동양인들은 일반적으로 성실하고 근면하며 절약 정신이 강했다.

그 모든 요소가 백인들에게 동양인 이민자들을 '선량한 이웃'으로 보게 만들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동양인 이민자들은 백인들의 협조자로 자리를 잡았다. 백인들은 동양인들을 '모범적인 소수 인종'(model minority)으로 불렀다. 그러한 상황이 흑인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을 동양인들에게 심어 주었을지 모른다. 이런 과정에서 동양인들은 부지불식간에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시각으로 미국 사회를 보게 되었다.

흑인 민권운동 기간에 백인들은 흑인들과의 논쟁 과정에서 동양인들의 성공담을 논리적 증거 중 하나로 사용했다. 흑인들의 문제는 사회의 불평등 구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 부재에 있다는 증거로서 동양인의 성공을 예로 사용한 것이다. 그 결과, 동양인들은 흑인 민권운동의 역사에 이렇다 할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 흑인들에게 동양인은 존재감이 없었고, 백인들에게 동양인은 협조자였다. 동양인들은 대부분 흑백 갈등의 역사 속에서 비켜 서 있었다.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차별적인 언행을 묵인했고, 때로는 동조하기도 했다.

흑인 민권운동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미국 사회가 유색인종에 대한 법적 차별을 개선해 나가고 있던 상황에서 1965년에 미국 이민법이 개정되면서 이민 문호가 활짝 열렸다. 1970년대에는 베트남전쟁이 끝나면서 동남아로부터 많은 난민이 미국에 이주해 정착했고, 한국, 중국, 인디아 등지로부터의 이민이 급증했다.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이 땅을 밟았을 때, 미국은 흑인들의 희생을 통해 평등한 대우를 법적 권리로 요구할 수 있는 환경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흑인들이 오랜 희생을 통해 얻어 낸 열매를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따 먹게 된 것이다.

하지만 새로 유입된 동양인 이민자들은 그들보다 먼저 이 땅에 정착한 동양인 이민자들의 태도를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다. 1991년에 로드니 킹 사건으로 인해 LA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 한인 사업장이 약탈과 방화의 표적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흑인들에게 동양인들은 백인들의 호의를 등에 업고 자신들의 직업을 빼앗아 가는 사람들로 인식된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은 지금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동양인들은 미국 주류 사회에서 좋은 협조자가 되어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또 많은 사람이 그 꿈을 이룬다. 하지만 흑인들을 비롯한 소수자의 권익을 위한 노력에는 별 관심이 없다. 불의한 사회구조나 제도를 고치는 것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다. 불의한 사회구조 속에서 열심히 일하여 번영하는 것이 유일의 관심인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조지 플로이드의 살해 현장에서 투 타우가 보여 준 태도가 지난 170년 동안 미국 사회 안에서 동양인들의 역사에 대한 상징처럼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태도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니 얼굴이 뜨거워진다. 그리고 그 영상을 보고 백인들은 우리 존재를 하찮게 여길 것이고 흑인들은 증오의 눈초리로 볼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참 부끄럽다.


▲ 5일 오후 올랜도 다운타운에서 벌어진 시위에서 한 여성이 "I can't breathe(나는 숨을 쉴 수 없다)"는 글귀가 적힌 조지 플로이드의 초상화를 들고 시위하고 있다. ⓒ김명곤

3.
다행히도 대략 한 세대 전부터 2세 혹은 3세 아시아계 미국인들 사이에서 지난 역사에 대한 반성과 각성이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연구 논문도 지속적으로 발표되고 있으며, 사회 변혁을 위한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연합체도 생겨나고 있다. 이번 사태 중에도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곳곳에서 제 역할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반성과 각성과 태도의 변화가 매일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일반 이민자들에게까지 파급되는 데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많은 동양계 이민자들은 이 사회가 어떻게 변화하느냐에 대한 관심보다는 이 사회 안에서 어떻게 개인적으로 번영하느냐에 대한 관심이 더 많다. 하기야 이 점에서는 백인들도 흑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개인적인 안전과 번영이 최우선의 관심사인 법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번영이 지속 가능하려면 사회 구조가 제대로 잡혀 있어야 한다. 조지 플로이드와 같이 허무하게 죽임당할 수 있는 사회라면 개인적인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회제도가 부조리해도 눈 질끈 감고 열심히 일하는 게 잘하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한 사회제도를 고치기 위해 목소리를 내고 연대하고 노력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미국인들의 사고방식과 법과 제도와 조직 안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인종 차별의 문제는 소수인종들이 서로 연대하여 해결해야만 한다. 차별이란 본디 차별당하는 사람이 제일 예민하게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디, 이 땅에 사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투 타오의 어정쩡한 행동을 보면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부조리한 사회에서 정의에 눈감고 영달을 꾀하는 것이 결국 자신의 발목을 잡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개인적인 영달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변화를 위해 고민하고 씨름하는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모범적 소수 인종'은 개인적인 영달의 성과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 대한 공헌의 정도로 평가받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의미로 '모범적 소수 인종'이라는 별명을 얻는다면, 그때에는 그 별명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을 것이다.


▲ 5일 오후 올랜도 다운타운에서 벌어진 시위에서 두 젊은 남녀가 "End Rascism(인종주의를 종식하라)"는 글귀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하고 있다. ⓒ김명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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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려짐: 2020년 6월 13일, 토 6:09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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