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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 종교
 
우리를 향한 주님의 존재론적 선언: 빈약한 세례 이해에 세례를 주다
[탐독의 시간] 윌리엄 윌리몬 <기억하라, 네가 누구인지를>(비아)

(서울=뉴스앤조이) 여운송 기자

우리가 세례에서 기대하는 것

때가 차매, 중학교 2학년이 된 나에게도 가슴 설레는 세례의 날이 밝았다. 목적은 오로지 하나. '성찬 취식 라이센스'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내 지금껏 저 빛나는 은그릇에 담긴 카스텔라와 포도 주스를 맛보지 못해 얼마나 서러웠던가. 1년에 단 두 차례 주어지는 이 불가침의 음식을 드디어 받아먹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례는 충분히 기대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되돌아보건대 "~를 믿느뇨?", "~하겠느뇨?" 하는 우스꽝스러운 질문, 빵과 포도주에 대한 철없는 욕망 이외에는 애석하게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여러분의 세례식은 어떠했는가? 누군가는 초코파이를 얻기 위해, 누군가는 주변의 권유나 자발적 선택으로 세례를 받았을 것이다. 유아세례를 받아 세례에 대한 기억조차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잊을 수 없는 감격의 세례식을 거행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교파 간 차이로 누군가는 침례를, 누군가는 약식례를, 누군가는 재세례를 받았을 것이다.

교회 역사를 보면 세례를 둘러싼 논쟁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유아세례냐 성인 세례냐, 침례냐 약식례냐, 재세례가 가하냐 불가하냐' 하는 신학 논쟁은 정작 교회 현장과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대부분의 신자는 세례에 크게 관심이 없다. 의미를 바로 알고 세례를 받는 신자도 드물다. 관심 있는 신자들이 종종 그 의미를 탐구하지만, 보통 세례는 교회 가입을 위한 통과의례 이상의 의미를 얻지 못하는 것 같다.

<기억하라, 네가 누구인지를 - 세례를 받는 모든 이들에게>(비아)는 세례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 그 의미의 축소와 왜곡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아 쓴 책이다. 저자 윌리엄 윌리몬은 "세례란 그리스도인들의 규범이자, 본이자 양식이며, 삶의 시작이자 끝"(203쪽)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저자는 초대교회 세례식을 훌륭하게 묘사하는 첫 '이야기'부터 책의 마침표를 찍기까지 시종일관 이야기하기(story-telling)를 멈추지 않는다. 딱딱한 논증보다는 교회와 신자의 일상 속에 담긴 세례의 원리를 충실히 길어 올리며 이해와 공감을 자아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그 자체로 '세례 교리에 대한 세례'다. 다루는 주제의 중요도와 재미는 필연적으로 반비례한다는 편견에 단단히 한몫하는 지루한 교리 서적의 원죄를 말끔히 씻어 내니 말이다.

책 구성은 '지식'과 '재미' 중 한 마리 토끼도 제대로 잡지 못하기 일쑤인 교리 교육 실패의 쓰라린 경험들을 충분히 상쇄할 만하다. 장별로 내용을 톺아볼 수 있게 하는 퀴즈들과 인도자를 위한 가이드는 덤이다. 저자는 220쪽 정도 되는 분량을 십분 활용하여 세례에 대한 풍성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나는 크게 네 가지 주제로 책을 재구성해 보려 한다. 첫 번째로 세례의 주체와 효력에 대해 다루고, 두 번째로 세례와 거듭남이 교회 공동체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핀다. 세 번째로는 죽음과 생명이 함께 역동하는 세례의 역설적 측면을 다루고, 마지막으로 세례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우리가 세례를 대할 때 궁극적으로 바라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짚어 보며 글의 마침표를 찍겠다.


▲ <기억하라, 네가 누구인지를 - 세례를 받는 모든 이에게> / 윌리엄 윌리몬 지음 / 정다운 옮김 / 비아 펴냄 / 224쪽

세례의 주체와 효력-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많은 사람은 세례를 생각할 때 '나'의 어떠함에 주목한다. 자신의 행실을 스스로 정한 도량형에 맞춘 저울에 달아보며 세례의 자격과 효력을 논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자신이 받았던 세례의 의미를 뒤늦게 돌아보는 신자들은 종종 지난 세례를 헛된 일처럼 생각하고는 한다. 믿음 없이 세례를 막(?) 받았고 지금도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혹은 세례를 준 목사에게 자격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효력이 애초에 없었거나 있었어도 잃었다는 식이다. 다수의 신자들이 자신의 세례를 못내 아쉬워하거나 심지어 재세례를 자청하기도 하는 이유다.

그러나 세례에서 드러나는 주님의 구원 의지는 인간의 행위에 근거하지도, 그리스도인에게 부과된 윤리적 당위의 불이행 때문에 좌절되지도 않는다. 저자가 가장 집요하게 강조하는 것은 세례가 근본적으로 '선물'이며 '주님의 일'이라는 사실이다. "세례는 우리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거의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다만 세례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이야기할 뿐이다(39~40쪽)." 세례는 자격지심의 무서운 함정에 빠져 '우리가 누구입니까?' 외치는 인간에 대한 신적 긍정이자 뒤집을 수 없는 존재론적 선언이다. '너는 나의 백성이요, 나의 사랑하는 자녀'라는 주님의 말씀과 함께, 세례 안에서 우리는 자격과 형편에 상관없이 용납되었다.

유아세례는 이러한 세례의 특성을 가장 극명히 드러낸다. 유아만큼 연약하고 무능력한 존재가 또 있을까. 유아는 세례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유아의 행위력 부재를 운운하며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이들은 성인에게도 동일한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대체 얼마나 이해하고, 믿고, 느껴야 자격이 생기는가? 주님은 우리의 자의적이고 어쭙잖은 기준을 비웃으신다. 우리의 어떠함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운 선택이 우리를 주님의 백성 되게 한다. 우리가 세례 요건을 갖춰서 마침내 주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우리를 이미 백성으로 용납하셨다는 사실이 세례에서 선포되는 것이다. 세례의 주체는 주님이시다. 주님이 베푸시는 선물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겸손히 빈손을 내미는 '받는 자'로 머문다.

우리가 유아세례를 받았는지, 성인 세례를 받았는지, 덤덤한 마음으로 세례를 받았는지, 기쁨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세례를 받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세례 안에서 우리가 주님의 백성으로 공표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자격과 형편이 아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이 이 선언의 보증이다. 세례가 어떤 방식으로 유효하게 되느냐는 케케묵은 논쟁을 들먹이기보다 우리가 주님에 의해 용납된 존재라는 놀라운 사실을 기억하고 붙드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




세례와 거듭남-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성서는 세례와 거듭남을 긴밀히 연결 짓는다. 세례는 거듭남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온전히 연결되어 있다(159쪽). 세례가 주님의 일이듯 거듭남도 주님의 일이며, 세례에서 우리가 받는 자이듯 믿음으로 거듭남에서도 우리는 오롯이 받는 자이다. 거듭남은 본질적으로 세례의 은총을 기억하며 수용하는 사건이다. 문제는 거듭남이 세례와 분리된 채로 개인의 결단이나 강렬한 신앙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순전히 사적인 경험으로 여겨지는 현실이다. 저자는 "오늘날 가장 대중적이고 거대한 이단은 '종교란 사적인 것'이라는 주장"(111쪽)이라며 이를 단호히 배격한다.

거듭남에 대한 사적인 이해는 자연스럽게 교회론 약화와 신자들의 개인화를 가져온다. 교회는 신자 개개인을 소위 '회심'이라 부르는 강렬한 신앙 체험의 지점으로 달음박질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제공하는 도구적 기관으로 전락한다. 자연스럽게 공동체의 기반이 되는 성사에 대한 교육은 빈약하고 집례는 허술하며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서 양육할 책임도 방기한다. 이 같은 구조에서 신자들은 본래 한 몸인 구원의 공동체에 단단히 결속된 지체들 중 개인이 아니라, 순간의 회심 좇아 각자 필요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모임의 회원으로 이해된다. 모든 사람은 서로에 책임을 지는 '신 앞에 함께 선 공동체'가 아니라, 결국 각자의 일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신 앞에 선 단독자'가 된다. 전통적으로 구원론이 교회론에 앞서는 서구 신학의 경향성도 이를 은연중에 반향한다.

그러나 주님의 일이자 교회의 일로서, 세례는 거듭남에 대한 사적인 이해를 거부한다. 주님은 개인이 아닌 교회를 향해 세례를 명령하셨고, 교회를 통해 세례를 베푸시며, 공동의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 세례는 한 명의 신자가 비로소 자립하게 되는 성인식이 아니다. 교회라는 가정 안으로 편입되는 '입양' 혹은 '탄생'이다. 새로 세례를 받고 공동체에 입양된 신자는 주님의 교회에 의존하게 된다. 교회 구성원 모두는 이에 대한 양육과 보살핌의 책임을 진다. 공동체로부터 받은 수혜는, 앞으로 수혜를 받을 이에게로 향하는 봉사로 이어지며 지체 간 결속은 나날이 단단해진다.

저자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지 않은 채 '그리스도 안'에 있을 수는 없다. 홀로 있는 그리스도인 같은 것도 없다."(112쪽)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교회)이 유형적이고 가시적인 제도권 교회를 뜻하는가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신자의 거듭남 문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상호 의존적이고 책임적인 공동체와 연결된 '공동체적 사건'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이른바 '가나안 성도 현상'이 낯설지 않은 현시점에서, 조금 과격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은 긍정적으로 재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세례의 역설- 생명으로 이끄는 죽음

세례의 문자적 의미는 '씻는 예식'이다. 실제로 죄를 물로 깨끗이 씻어 내는 이미지는 세례가 내포한 의미들 중 가장 보편적이고도 직관적인 이미지다. 성서에는 '세례 요한의 세례'와 '그리스도인의 세례'가 등장한다. 요한의 세례는 물로 죄를 씻는 세례로, 오실 메시아를 대망하는 인간의 예비 의식이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의 세례는 물과 성령의 세례로, 요한의 세례를 모체로 삼으나 이를 훨씬 뛰어넘는다. 성령이 주재하는 신적 행위로서 '재창조'라는 의미가 더해진 까닭이다. 죄 씻음과 재창조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죄를 단지 '그릇된 행동'으로 보는 반면, 후자는 전자의 의미를 포함하면서도 죄를 본질적으로 '일그러진 본성'으로 본다. 그러므로 세례는 행위의 옳고 그름을 처리하는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오는 혁신적 사건이 된다.

죄의 결과는 죽음이다. 고대의 교회에서 세례대를 '무덤'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세례 행위를 죽음으로 들어가는 일로 이해했음을 보여 준다. 새로운 탄생(재창조)을 위해 죽음을 맞는다. 이것이 세례의 역설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걸어간 삶의 궤적을 추적하며 이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 예수의 세례는 성령의 임재와 함께 출발한 공생애 순종의 시작이었다. 또한 십자가의 죽음은 완전한 순종이자 세례의 완성이었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 세례를 받아 그의 탄생과 삶,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다.

이런 측면에서 죄를 개인적인 행위로 축소하는 일은 재창조라는 세례의 의미를 반감한다. 죄를 죽어야만 갱신될 수 있는 본성의 비극으로 이해할 때에야 모든 것을 재창조하는 세례의 은총 아래서 이전 본성과의 단호한 절연을 선언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가 죄에 대해 비관하는 것은 은총에 대해 낙관하기 때문(107쪽)이다. 예수의 죽음과 더불어 죽음의 세례대로 기꺼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성령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는 확신 때문이다. 교회가 전통적으로 세례식을 죽음에서 부활로,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부활절 전야에 거행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례의 반추- 돌이킴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다

달리는 말은 뒤돌아보지 않는다지만, 제자도에 정진하는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뒤돌아봐야 한다. 돌아서는 것과 돌아보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돌아서지 않고도 충분히 돌이켜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은 돌이킴을 통해서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냉담자나 낙심한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듣는 권면 중 하나가 "첫사랑을 회복하라"는 말이다. 이런 말들은 대게 '회심'의 순간을 생각해 보라는 의미로 쓰이지만, 세례가 무엇인지 배운 우리는 좀 더 근본적으로 '세례'의 순간을 돌이켜 보아야 한다.

세례는 단회적인 사건이지만, 결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세례를 끊임없이 반추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과정이야말로 신앙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크나큰 원동력이다. 세례는 우리 믿음이 연약하여 흔들릴 때마다 돌아가야 할 은총의 원천이다. 그 물의 의미를 기억하면서 우리의 존재를 가만히 들여다볼 때 우리는 우리가 정녕 누구인지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물에 비친 우리 모습은 어김없이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주님의 소유 된 백성'일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보증하시고 교회 공동체가 지지하는 명백한 사실이다.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세례와 함께 주님이 공동체에 위임하신 은총의 약속은 변하지 않는다.

이처럼 세례는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 명확히 말해 준다. 우리는 주님에 의해 용납된 자이고, 교회 공동체 안으로 용납된 자이다. 우리가 세례로부터 진정으로 기대해야 할 것은 진정한 의미의 '정체성 환기'다.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되새길 때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자신의 백성들을 향한 주님의 무한한 긍정을 재확인한다. 세례 공동체인 교회의 공동 예배, 성도들의 교제는 우리의 신앙생활 전체가 철저히 주님과 교회에 의존적이며 은혜로운 선물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신자들은 서로의 모습 속에서 공동으로 받은 세례의 은총을 확인하며 위로를 얻고 주님께 감사를 올려 드린다. 우리는 이 놀라운 사실을 거듭 확인하고 함께 기뻐하기 위해 매주 교회에 모이고, 이 기쁨을 전하기 위해서 교회 밖 세상으로 향한다. (본보 제휴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0년 8월 14일, 금 3:44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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