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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족/통일
 
베를린장벽 설치와 붕괴... 독일은 하고 한국은 못한 것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베를린장벽 설치 과정과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

(서울=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 한국에서 5·16 군사 쿠데타가 있었던 1961년, 독일에서도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동독 영토에 둘러싸인 서독령 서베를린을 포위하는 베를린장벽이 그해 8월 13일부터 구축됐다.

제2차 세계대전 뒤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은 독일 전역을 넷으로 쪼개는 동시에 독일 수도 베를린도 넷으로 분할했다. 이 중에서 미국·영국·프랑스 점령지가 서독 및 서베를린, 소련 점령지가 동독 및 동베를린이 됐다. 이 상태에서 1961년 8월 베를린장벽 축조가 시작됐다.

동·서 베를린의 교류가 차단될지 모른다는 우려 속에 동독인들은 훗날 서독 총리가 될 빌리 브란트가 시장으로 근무하는 서베를린(서백림, 西伯林)으로 탈출했다. 장벽 착공 이틀 전인 8월 11일에는 탈출 러시가 대규모로 일어났다. 그해 8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 '동독 피난민 격증'은 UPI통신 급전(急傳)을 근거로 이렇게 보도했다.

"서백림으로의 탈출로를 봉쇄하기 위한 철저한 새로운 조치가 취하여질는지 모른다는 우려로 인하여 11일 자유 서백림으로 탈출한 동독인은 2017명으로 8년 래(내)의 신기록을 내었다. (중략)

동·서 경계 요소에 증파된 공산 경찰은 피난민 수백 명을 제지하였으나 도전적이며 결사적인 피난민들을 저지하기에는 무력하였고, 목격자들에 의하면 여러 경관은 탈출자들을 붙들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백림 마린펠데 피난민수용소에 12일 등록된 피난민은 2017명이며 금년 현재까지의 피난민 총수는 15만 명이다. 8월 1일부터 현재까지의 피난민 수는 약 2만 명이다."


▲ 베를린장벽을 건설하는 모습. 1961년 11월에 촬영된 사진. ⓒ wiki commons

미국-소련 중심 냉전 구도에 켜진 빨간 경고등

미국과 소련 중심의 세계 질서가 시작한 1945년으로부터 10여 년 뒤인 1950년대 중반부터 두 나라 중심의 냉전 구도에 적신호가 켜졌다. 미국은 유엔군을 동원하고도 북한·중국과의 한국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하지 못했다. 또 미·소 어디에도 가세하지 않는 아시아·아프리카 비동맹운동이 벌어졌다. 거기다가 서유럽의 대미 의존도를 떨어트리는 유럽통합운동의 결과로 1952~1958년 사이에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유럽경제공동체(EEC)·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가 출현했다.

이런 흐름이 확산되는 것을 막고자 미·소 양국은 1960년대 초반 동아시아에서 자기 진영에 대한 단속에 착수했다. 미국이 1960년에 미일안전보장조약을 미일상호협력안보조약으로 업그레이드시키고, 1961년에 출현한 박정희 반공 정권을 지지하며 1965년에 한국과 일본을 묶는 한일기본조약 및 한일협정 체결을 조종한 것은 이런 일련의 흐름을 반영한다. 소련이 1961년에 북한과 군사동맹을, 중국이 같은 해에 북한과 군사동맹을 체결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동일한 흐름이 유럽 냉전의 최전선인 베를린에서도 벌어졌다. 동아시아에서는 미국이 좀 더 공세적이었던 데 반해, 이곳에서는 소련이 보다 더 공격적이었다. 베를린이 동독 영토 내에 있었으니 아무래도 공산권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1958년에 소련이 서베를린 중립화를 요구한 것도 그런 배경에서 나온 사건이다. 미국의 영향을 받는 서베를린을 중립화하자는 제안은, 서베를린을 자국의 영향권 하에 두는 동시에 이 논의를 통해 대결 구도를 선명화하려는 소련의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 벌어진 사건이 베를린 장벽 설치다. 서베를린을 통한 동독인들 망명으로 인해 냉전 체제에 금이 가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장벽 설치를 통해 냉전 구도를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일이다. 독일 역사학자 하겐 슐체(Hagen Schulze)가 쓰고 문학자 반성완이 번역한 <새로 쓴 독일 역사>는 장벽 착공 개시 이후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베를린을 둘러싼 신경전이 극에 달하자 드디어 1961년 8월 13일 동독 병사들과 제복을 입은 준군사 요원들이 밤사이에 서베를린을 빙 둘러싸는 가시철조망과 참호를 설치하였다. 몇 주 후에는 베를린 중심부를 가로질러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이 세워졌다. 장벽이 설치된 이후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경계 보초병이 쏘는 총알 세례 속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거는 모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 빌리 브란트. ⓒ wiki commons

냉전 강화하려 세워진 베를린 장벽, 그리고 서베를린 시장

장벽이 세워지고 서베를린이 포위되는 이런 상황에서, 그 누구보다도 냉전적인 발언을 쏟아낸 인물이 빌리 브란트 서베를린 시장이다. 얼마 뒤에 독일판 햇볕정책인 동방 정책의 주역이 될 브란트는, 그러나 장벽이 세워질 당시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냉전적 대응을 구사했다.

1913년 뤼벡에서 태어나고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 채 성장한 빌리 브란트는, 17세 때 사회민주당(사민당)에 가입하고 1933년 아돌프 히틀러 수상 취임 뒤로 지하 활동에 뛰어들었다. 그의 원래 이름은 헤르베르트 에른스트 카를 프람(Herbert Ernst Karl Frahm)이다. 빌리 브란트는 지하 활동 때 사용한 이름이었다. 체포 위험 때문에 노르웨이·스웨덴으로 망명한 그는 제2차 대전 종료 뒤 베를린으로 귀환하고, 1949년(36세) 연방의원 당선을 거쳐 1957년(44세)에 서베를린 시장이 됐다.

시장 취임 전부터 햇볕정책 같은 사고를 갖고 있었던 브란트는 소련이 자기 근무지를 위협하고 장벽을 치는 상황에서 냉전 투사의 모습으로 돌변했다. 한국의 극우 반공 세력이 북한 체제를 비하할 때 사용하는 '집단수용소'라는 표현을 사용해가며 동독 체제를 비판했다.

또 소련과 동독 정부의 장벽 구축을 비판했을 뿐 아니라 양국에 대한 압박정책의 강화도 주장했다. 1961년 8월 14일에는 하인리히 폰 브렌타노 서독 외무장관에게 서신을 보내 동독에 대한 경제 제재도 주문했다.

하지만 그는 한국의 냉전주의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장벽 설치의 최대 피해 지역인 서베를린의 시장으로서 냉전 상황을 이용해 정치적 주가를 올리려 하는 모습을 그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장벽을 극복하고 새 시대를 열 방법을 모색했다. 이 시기에 브란트가 고민했던 바를, 올해 2월 <역사학 연구> 제77집에 실린 노명환 한국외대 교수의 논문 '베를린장벽 설치에 대한 빌리 브란트의 반응과 동방정책 구상'은 이렇게 소개한다.

"브란트는 이렇게 냉전적인 입장에서 베를린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을 하면서도 그 한계성을 명확히 직시하고 있었다. 압력을 가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할수록, (또) 동독 정부가 위협을 느끼면 느낄수록, 문제가 해결되기보다는 상황이 더 악화된다는 점을 다시 확인했다. 동독 사회와 동구 공산권은 대외적으로 더욱 폐쇄되고 대내적으로 더욱 통제사회로 변해 감을 깊이 인식했다. 그 명백한 현실이 베를린장벽 사태임을 그는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브란트를 냉전주의자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지만, 물론 이때는 분명 그랬지만, 그의 행보를 관통하는 변치 않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장벽 설치를 원치 않았다는 점이다. 냉전적 표현을 써가며 동독과 소련을 맹비난한 것은 장벽 설치를 막기 위해서였고, 그 뒤에 새로운 방법을 모색한 것 역시 장벽 해체를 위해서였다.

브란트는 공산 진영이 장벽을 구축한 것은 그들의 힘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허약을 입증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장벽 구축이 외형상으로는 공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기방어를 위한 조치였다고 이해한 것이다. 그가 느낀 바는 "서방세계가 약해서 베를린장벽이 세워진 것이 아니라 동독과 공산권이 취약해서 세워진 것"이었다고 위 논문은 분석한다.

빌리 브란트, '동방정책'으로 협력을 제안하다

브란트가 내린 결론은, 장벽 설치 이전에 갖고 있던 생각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동독에 대해 따뜻하게 손을 내밀고 화해와 협력의 길을 제안하는 것이 장벽을 걷어내는 첩경이라고 그는 판단했다.

이런 생각이 '동방정책'으로 응집됐다. 1966년 외무장관 부임과 1969년 총리 취임을 계기로 그 생각이 머릿속을 빠져나와 현실 세계를 움직였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서관으로 공산권 북방정책에 관여한 염돈재의 <독일 통일의 과정과 교훈>은 브란트의 동방정책(신동방정책)을 이렇게 설명한다.

"젊은 세대의 변화 욕구를 발판으로 집권한 브란트 총리는 '접근을 통한 변화'를 표방하면서 동독은 물론 소련·동유럽권과의 적극적 접촉을 추진했으며, 특히 동독과는 '1민족 2국가'를 표방하면서 대등한 입장에서 회담할 것을 제의했다. 브란트의 신동방정책은 (지금 당장에는) 현실적으로 통일이 불가능하므로 동독과의 교류·협력을 증진하여 '사실상의 통일'을 달성한다는 뜻으로 통일정책이라기보다는 '분단의 평화적 관리정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동방정책을 머릿속에 담은 인물이 총리가 됐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를 지지해주는 대중이 있어야 했고 이런 상황을 뒷받침해주는 환경이 있어야 했다.

이때 동서독에는 그런 것이 갖춰졌다. 상당수 독일인이 동방정책을 지지했고, 국제환경도 동방정책에 유리했다. 냉전체제 약화를 막고자 미·소 양국이 1960년대 초반에 단속을 강화하는 듯했지만, 1968년부터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고전함에 따라 1970년을 전후한 시점부터 '데탕트'라는 긴장완화 조짐이 나타나게 됐다. 미·소의 패권이 약해진 결과였다.

이런 정세 변화가 브란트의 동방정책에는 결정적 도움이 됐다. 1970년 동서독 정상회담,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 1973년 동서독 유엔 동시가입은 브란트의 동방정책과 세계적인 데탕트(détente: 적대 관계이던 나라들 간 긴장완화) 기운 그리고 독일인의 응원이 맞물려 일어난 일이다.

이 시기에 브란트가 이룩한 업적은 1990년 전후의 탈냉전 때 노태우 정부가 이룩한 성과를 초월한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는 동서독 기본조약에 못 미친다. 1990년 전후의 남북한은 1970년 전후의 동서독을 따라잡지 못했던 것이다.

동서독이 데탕트를 활용하던 1970년대 초반의 한국에서도 7·4남북공동성명 등이 있었지만, 남북한은 이때도 기회를 활용하지 못했다. 준비 없이 데탕트를 맞이한 데다가 이를 정략적으로 이용한 탓에 실질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70년 전후와 1990년 전후에 있었던 두 차례의 결정적 호기를 동서독은 잘 활용한 데 비해, 남북한은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동서독이 1970년 전후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냉전의 상징인 베를린장벽에 안주하며 거기서 기득권을 찾으려 하지 않고 냉전을 적극적으로 극복하려 한 빌리 브란트를 중심으로, 상당수 서독 국민이 뭉쳤고 동독 역시 이에 화답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진전된 생각을 가진 브란트가 총리가 되어 뜻을 펼쳤다는 것은 생각을 함께하는 독일인들이 열심히 응원했음을 의미한다. 빌리 브란트를 만든 것은 결국 독일의 역량이라고 할 수 있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0년 8월 14일, 금 4:23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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