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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 문화
 
아이히만에게도 양심은 있었다
[독서에세이]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고

(서울=오마이뉴스) 이인미 기자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비중있는 조연을 꼽으라면 친위대 수장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일 것이다. 자주 등장할 뿐 아니라 등장할 때마다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중 하나가, 살인명령과 학살임무 앞에서 친위대원들이 고통스럽게 맞닥뜨리게 될 '양심의 문제'를 그가 해결해주었다는 점이다.

힘러는 죄의식의 방향을 바꿔주었다. 죄의식이 올라오는 건 양심 때문이 아니라 책임 때문이야, 라는 식이다. 윗사람의 말을 '잘 따르는 특징'을 가진 친위대원들은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힘러의 말씀(?)을 충실히 따랐다. 그 결과,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을 하고 있는가'라고 말하는 대신 '나의 의무를 이행하는 가운데 내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목격해야만 하는가, 내 어깨에 놓인 임무가 얼마나 막중한가'라고 살인자들은 말할 수 있게 되었다. - 174쪽

아이히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아이히만 재판을 총진행한 란다우 판사나 당시 재판 방청객들이 공통적으로 품게 된 도덕적 물음이 있었다. '아이히만에게 과연 양심이 있을까?' 또는 '양심이 있다면 어떻게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였다. 양심에 관한 이 같은 물음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어나가는 동안 독자들의 머릿속에도 계속 떠오르는 물음이리라.

아렌트의 입장부터 언급하자면,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관찰하는 동안, 양심의 '있고 없음'보다 양심의 '방향'으로 초점을 전환하게 되었다. 양심이 있어서 가책도 느낄 수 있는데, 방향 면에서 치명적 오류가 일어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책표지 ⓒ 한길사

양심의 작동

나치 치하, 독일인 절대다수는 히틀러를 신봉하고 있었다. 이 절대다수에 대하여 용감하게 반란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빈번히 나타났었다. 아렌트는 그들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도덕적 분개에 의해서나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거의 전적으로 독일이 앞으로 패배하고 폐허가 될 것이라는 신념에 따라 움직였다. - 168쪽

즉, 양심이 반란음모의 주된 동기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그 문제를 지적한 다음, <백장미단>의 한스&조피 숄 남매를 비롯해 죽기까지 나치에 항거한 몇몇 사람들을 거론할 때 비로소 양심의 건강한 존재감과 작동을 언급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양심은 어느 때 누구에게서나 작동한다. 그런데, 인간의 양심을 관찰할 때는 그 사람이 죄의식을 느끼는 방식과 방향에 중점을 둘 필요가 있다. 믿기 어려울 수 있지만 아이히만에게도 죄의식이 있었다.

그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죄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일으키는 것'이었다(178쪽). 그 시대에 아이히만처럼 생각한 사람은 또 있었다. 1944년 한 독일인 여성지도자는, 만일 불행하게도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하더라도 가스 사용을 통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총통이 미리 예비해두었으니,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다른 사람들을 격려했다(179쪽).

가스 사용을 통한 편안한 죽음, 안락사 같은 죽음, 당시 유대인들이 맞이한 죽음이 바로 그런 죽음이었다. 아이히만과 익명의 여성 지도자는 느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가스 사용을 통하여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는가? 거기엔 '배려'가 들어있었다고···. 타인(들)을 향한 배려는 양심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다. 배려를 느끼고 있는 한, 양심은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다시 또 아렌트는, 1945년 1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탈출을 권유받은, 한 여성(정맥류 환자)이 한 말을 전해준다. 당시 그녀를 진찰했던 의사 한스 폰 렌스도르프가 쓴 책에 나온 내용을 인용하였다(180쪽). 정맥류 환자는 말한다.

"러시아인들은 결코 우리를 잡지 못할 거예요. 총통께서는 결코 그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보다 훨씬 전에 그가 우리에게 가스를 줄 것이니까요." 그런 다음 그녀는 무겁게 한숨을 내쉰다. "이제 그 모든 좋고 값비싼 가스를 모두 유대인에게 낭비해버렸으니!"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 주제를 바로 이 지점에서 넓고 깊게 확충해나갔다. 악은 인간의 외면에 무슨 특이한 표식을 내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내면에서도 딱히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

외면과 내면 어디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본 어떤 사람들은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 속았다며, 아렌트를 비판한다. 무죄를 주장하는 세상 모든 피고들처럼 아이히만도 그랬는데, 아렌트가 그걸 몰라봤다는 것이다. <한겨레21(제1046호) 2015년 1월)>에 실린 글의 논리에 동의하는 이들이 꽤 있으리라(이동기의 현대사 스틸컷: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속았다).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8883.html

나는 위의 글에 동의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무죄'를 주장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오히려 유엔총회에서 제시됐던 '대량학살에 대한 협약(1948)'을 따라 전 인류가 참여하는 국제형사재판을 열어 온 세상에 "건전한 소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을 만큼 아이히만의 죄가 막중하다고 판단했다(371쪽).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무죄를 주장하는 말에 넘어간 게 아니라, 무죄 주장 방식으로서 그의 '자기합리화'를 철저히 분석하는 가운데, 양심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악의 평범성'을 발견한 것이다. 양심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삶, 인간은 그런 삶을 살고자 한다. 아이히만도 다르지 않았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꼼꼼히 읽는다면, 외면과 내면 모두에서 악의 평범성 징후를 지닌 아이히만에 대한 아렌트의 분석을 이해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외면과 내면을 통틀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권유하는' 아렌트를 만날 수 있다.

외면과 내면에서 악과 거리를 두고 싶고, "나뿐 아니라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은 악과 관계가 없어요"라는 주장을 펼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아이히만에게 속은 아렌트'를 만나게 된다고 말하겠지만.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0년 10월 23일, 금 4:41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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