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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의 박찬호, 김영삼은 왜 그를 청와대로 불렀나
[김은식의 야구야] 팀이 아닌 선수의 눈으로 야구를 보다

(서울=오마이뉴스) 김은식 기자 = 1990년대 초반 한국 사회에서 가장 널리 입에 오르내린 시사 용어는 '우루과이 라운드', 'WTO' 혹은 '세계화'였다. 1986년 9월 우루과이에서 시작되어 1994년 4월에 마무리된 다자간무역협상을 통해 이전까지 제외되어 왔던 농산물과 서비스 산업들까지 자유무역협정의 대상에 포함되었고, 세계자유무역을 주도해온 GATT(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가 보다 강력한 구속력을 가지는 WTO(세계무역기구)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1993년에 출범한 김영삼 정부가 이런 세계질서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로 하면서 당장 쌀을 비롯한 농산물 시장 개방이 가시화되었고, 여전히 대부분 농촌에 고향 집과 부모가 있던 당대의 한국인들에게 직접적인 충격으로 다가왔다.


▲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세계화(segyehwa)를 국가발전전략으로 제시하고 세계화추진위원회를 발족해 직접 경과 보고를 받을 정도로 이를 야심차게 추진했다. 사진은 1995년 3월 9일 영국산업연합회 회의에 참석해 연설하는 김영삼 대통령. ⓒ 국가기록원

정부 홍보 채널들은 우리 민족이 세계 무대에 뛰어들어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는 기회라고 강조하며 박정희 정부 시절보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할 수 있다' 캠페인을 밀어붙였고, 수출 시장의 확장이라는 호재를 만난 대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세계 일류'의 포부를 외치며 뒤를 따랐다.

하지만 경쟁 자체가 불가능한 조건이라는 사실을 아는 농민들은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고, 마찬가지로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소멸의 위기를 맞게 된 여러 사회적 약자들이 연대하기 시작했다.

그런 맥락에서 '세계화' '국제 경쟁력' '세계 수준' '경쟁 승리' '과감한 도전' 등등의 단어들이 한 편에 그리고 '생존권', '식량주권', '우리의 것' '약자 보호' 등등의 단어들이 다른 한 편에 늘어서서 서로 목소리를 높이며 '기회'와 '위기'를 외치는 시대에 돌입했다. 가수 배일호가 종로 거리에 모여 있던 쌀 시장 개방 반대 시위대를 찾아 마이크를 잡고 신곡 '신토불이'를 홍보하던 시대였다.

1994년 1월 11일, 한양대 3학년생 박찬호가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의 LA 다저스에 입단한 것은 그런 배경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세계 도전의 시대, 박찬호의 등장

과거 1960년대 중앙고 출신의 투수 이원국이 마이너리그 더블A 팀을 거쳐 멕시칸리그에 정착해 정상급 투수로 활약한 적이 있고, 1980년에는 연세대의 복학생 투수 박철순이 역시 마이너리그 더블A 팀에서 뛰다가 한국에서 프로야구가 창설되자 돌아온 적이 있다.

그리고 1981년에는 역시 연세대 출신 투수 최동원이 캐나다의 메이저리그 구단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입단 계약을 맺기도 했지만 계약조건 수정 요구와 병역 문제 때문에 결국 실제 입단과 출전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파기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박찬호는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메이저리그 팀에 입단했고, 실제 시즌 개막 때부터 엔트리에 진입해 데뷔전까지 치렀다는 점에서 달랐다.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가 탄생한 것이다.

그가 받은 계약금 120만 달러는 그해 메이저리그 신인 중 가장 높은 순위로 선발된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받은 150만 달러와 30만 달러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거액이었고,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리그에 직행한 것도 역사상 17번째에 해당할 만큼 특별한 대우였다.

데뷔 직후 잠시 마이너리그 강등을 경험하긴 했지만 제구를 다듬는 약간의 교정 기간을 거친 뒤 곧 복귀했고, 3년 차인 1996년부터 선발진에 합류하기 시작해 정상급 선발 투수로 자리 잡아 2010년까지 17시즌 동안 124승을 기록했다.


▲ 박찬호의 메이저리그행 박찬호는 미국프로야구 역사상 17번째,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리그에 직행했다는 점에서 더욱 큰 충격이었다. ⓒ 한겨레신문(1994년 4월 3일자)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진출과 성공은 한국의 야구 선수들이 해외로 진출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박찬호의 성공으로 한국 선수들에 대한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관심과 평가가 높아졌고, 동시에 유학 비자를 통해 병역을 연기하고 출국해 미국 프로팀에 입단한 뒤 국가대표팀에서의 실적을 통해 병역면제 혜택을 받은 박찬호의 방식이 답습되었기 때문이다.

박찬호 이후 조진호, 김병현, 김선우 등 2021년 시즌까지 메이저리그에 출전한 경력이 있는 경우로만 한정해도 25명의 한국인 선수들이 미국 프로야구팀에 입단했으며, 마이너리그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대략 80여 명에서 100명 안팎에 달한다.

한국의 많은 야구 관계자들을 더욱 설레게 만든 것은 당시의 박찬호가 어떤 기준에서든 국내 최고의 선수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고교와 대학 무대에서도 그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 선수들이 여럿 있었고, 프로 무대의 에이스급 투수들과는 아예 비교조차 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한국 프로야구에서 활약하며 실력을 충분히 검증받은 선수들의 해외 리그 진출은 오히려 쉽지 않았다. 우선 선수에 대한 구단의 배타적 보유권이 강력하게 보장되어 구단과의 합의가 이루어져야만 가능했을 뿐 아니라, 선수들의 나이가 비교적 많은 반면 그에 비례해 실적도 많아 기대하는 연봉이 높아서 계약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내 최고의 투수인 선동열이 수 차례의 여론조사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국민적 압박에 의지해 1996년 임대 형식으로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한 뒤로 각 포지션에서 국내 최고로 인정받는 선수들은 자유계약선수 자격을 얻은 뒤 상대적으로 연봉이 높은 일본 프로야구로 건너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종범과 이상훈, 구대성과 이승엽 등이 그런 경우였다.

미국으로 가는 신인들, 일본으로 가는 베테랑들

물론 그 반대 방향의 선수 이동도 활발해졌다. 1998년부터 한국 프로야구 리그도 해외 선수들의 입단을 허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외국인 선수 선발 문제는 이미 1990년대 초반부터 삼성, LG 그리고 프로야구 참여 이후로는 현대 등의 대기업 계열 구단들이 '경기력 향상과 볼거리 확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반면 나머지 구단들이 '인건비 상승'을 이유로 반대하고 사무국이 '전력 평준화 저해'를 이유로 역시 동의하지 않으면서 진전이 되지 않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국내 선수들의 해외 진출이 확대되면서 선수 수급이 어려워져 오히려 국내 선수들의 몸값이 지나치게 부풀려지는 문제가 나타났고, 자연스럽게 반대의 명분이 약해지면서 빠르게 진전되어 1996년 11월 KBO 이사회에서 통과되었다.


▲ 나고야의 태양. 한국 야구를 상징하던 에이스 선동열도 1995년 시즌을 끝으로 일본으로 무대를 옮겼다. 1996년에는 적응에 실패하며 2군으로 내려가는 부진을 겪었지만 1997년에는 38세이브로 구원왕에 오르며 자존심을 살렸다. 이듬해부터는 팀 후배 이종범도 같은 주니치 유니폼을 입게 됐는데, 그로부터 타이거즈와 한국 야구의 상황은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라는 김응용 감독의 넋두리로 상징되었다. ⓒ 국가기록원

국내·외 선수 시장이 통합되면서 나타난 변화는 각 구단의 전력, 선수들의 계약금과 연봉, 경기의 내용과 기록 등 공급 측면에서 주로 나타났다. 하지만 미국 메이저리그 경기의 국내 중계방송은 소비 측면, 그러니까 한국인들이 야구를 즐기는 방식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승격이 가시화되던 1996년 MBC와 KBS는 메이저리그 사무국으로부터 박찬호 선수가 선발 등판하는 경기 6경기를 국내에 위성 중계방송하는 조건으로 5만 달러를 지불하는 최초의 미국 프로야구 경기 국내 중계방송 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박찬호가 그해 시즌 중에 10번의 선발 등판 기회를 얻은 것을 비롯해 5승을 기록하며 선발진에 정착하자 이듬해인 1997년에는 독점계약권을 따내기 위한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되었다. MBC가 20만 달러에 30경기를 중계하는 조건으로 먼저 계약에 접근하자 KBS가 경기당 1만 달러를 제시하며 독점 계약권을 가로챈 것이다.

하지만 다시 그해에 박찬호가 선발 14승을 거두며 신드롬을 일으키자 이듬해인 1998년에는 MBC와 KBS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사이 인천 지역의 지역민방인 iTV가 2000년까지 3년간 박찬호 선수의 경기를 포함한 올스타전과 월드시리즈까지 메이저리그 전 경기에 대한 독점중계권을 400만 달러의 압도적인 금액을 투자해 확보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갑자기 인천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박찬호 등판 경기를 볼 수 없게 되는 사태가 벌어졌고, 수많은 유선방송업체들이 iTV와 접촉하기 위해 줄을 서는 소동이 이어진 것은 물론이다. 이 해 박찬호 신드룸은 워낙 거세서 김영삼 대통령은 청와대로 박찬호를 초청하기까지 했다. 이 시점에 박찬호는 김영삼 정부가 내세우던 '세계화'의 상징이었다.

메이저리그 중계방송의 시작

빠르게 상승한 중계권료에도 방송사들의 경쟁이 계속된 가장 큰 이유는 비인기 시간대인데도 안정적인 시청률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2001년 MBC가 다시 독점 중계권을 확보했을 당시 박찬호 선수 등판 경기의 평균 시청률은 9%, 최고시청률은 19.2%에 달했는데 미국과 한국의 시차 때문에 이른 아침이나 오전의 일과 시간 중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도 주말 오후의 황금 시간대에 이루어지는 한국프로야구 경기 시청률을 크게 앞질렀다.

외국인 선수들이 한국 프로야구 리그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변화들이 나타났다. 장타력이 좋은 타자들이 늘어나고 홈런이 늘어나면서 번트와 치고 달리기 등 작전의 효용이 줄어든다거나 팔 길이가 상대적으로 긴 타자들이 늘어남으로써 횡적 변화를 일으키는 슬라이더의 효용이 감소하고 커브나 포크볼과 같은 종적 변화를 일으키는 변화구를 잘 구사하는 투수들의 성적이 향상되는 등의 경기 내용 변화들이 그 예다.

물론 더욱 근본적인 변화는 해외 프로야구 리그의 경기들이 국내에 직접 중계 방송되기 시작하면서 일어났다. 박찬호가 미국 메이저리그 선발 로테이션에 안착하고 선동열이 일본 프로야구 1군 무대에서 정상급 마무리 투수로 정착한 1997년부터 국내 방송국들은 미국과 일본의 프로야구 경기를 본격적으로 중계방송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야구 관람 문화 전반으로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경기 내적으로도 선발 투수에게 철저한 4일 이상의 휴식일을 보장하고 출전한 경기에서도 가급적 투구 수 100개 안팎에서 교체해주는 메이저리그의 운영 방식이 한국에서도 상식화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방송 중계 화면에 볼 카운트와 더불어 선발투수의 투구 수를 표시하기 시작한 것 역시 박찬호 경기 중계방송이 시작된 이후의 변화였다.

투수의 기록 역시 승리와 패배, 세이브 정도만 기록하던 것과 달리 6이닝 이상 던지면서 3점 이하의 자책점을 기록하는 것을 가리키는 '퀄리티 스타트 quality start' 개념이 도입되어 선발 투수를 평가하는 새로운 기준으로 정착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에 따라 완투 능력을 선발 투수의 자격으로 여기던 인식이 퇴조하고 철저한 로테이션 체제가 정착하면서 투수들의 선수 수명이 늘어난 것 또한 중요한 변화였다.

팀이 아닌 선수를 통해 야구를 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국내의 야구팬들 대다수가 소속팀 LA 다저스가 아닌 박찬호라는 한 선수의 관점으로 야구를 보게 되면서 야구에 대한 개인주의적 관점이 도입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연고 지역을 대표하는 상징이자 해당 지역 출신자들의 집단적 정체화의 대상으로 인식되어온 기존 한국 프로야구팀에서는 개인의 기록을 앞세우는 선수는 지탄받곤 했고 부상 위험을 감수하면서라도 팀을 위해 헌신하는 선수들이 높이 평가받는 집단주의적 정서가 지배하고 있었다.

야구팀은 하나의 지역을 대표하고, 팬은 그 지역을 구성하는 일원으로서 팀과 동일시하는 것이 지역 연고제에 기반한 한국 프로야구의 전통적인 소비방식이었다.

하지만 박찬호라는 한 명의 투수에 감정이입해 경기를 보는 팬들에게 투수의 기록은 팀의 승패보다 더 중요하게 인식되었고, 기록과 무관하게 투수의 체력을 소모하는 감독의 기용 태도는 분노의 대상이 되었으며, 때로는 박찬호와 경쟁 관계인 팀 내 투수의 부상은 경사로까지 인식되곤 했다.

같은 한국인이라는 공감대 속에서, LA 다저스라는 낯선 무대에서 생존 경쟁하는 박찬호라는 선수 개인을 응원하는 팬들은 조직의 성공과 더불어 그보다 더 결정적인 개인의 생존과 성공을 도모하는 한 개인의 정체성에 몰입하도록 유도되었다.


▲ 대통령 접견하는 박찬호. 박찬호가 미국 진출 3년째인 1997년 14승을 기록하며 선발 투수로서의 입지를 굳히자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로 초청해 그를 만났다. 그 시점에 박찬호는 김영삼 정부가 내세우던 '세계화'의 상징이었지만, 이듬해부터는 외환위기의 좌절에 신음하는 국민들에게 남은 한 가닥 위로의 상징으로 바뀌고 말았다. ⓒ 국가기록원

그래서 5일에 한 번, 평일 오전의 일과 시간대에 몰래 TV가 놓인 공간을 기웃거리며 중계방송에 몰입한 이들에 의해 최고 18.2%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메이저리그 경기 중계방송은 한국 야구의 소비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예컨대 그런 인식이 확장하며 국내 경기에서도 부상을 무릅쓰는 선수의 희생적 플레이는 금기시 되기 시작했고, 선수 보호는 지도자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의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야구팬들은 박찬호를 통해 팀이 아닌 선수의 관점에서 야구를 관전하는 태도를 처음 접했고, 야구는 개인주의화하는 시대의 변화에도 어긋나지 않는 문화상품으로 진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들은 민주화와 글로벌화 흐름에 한국프로야구라는 시장 역시 동조화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 영향은 예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도 훨씬 컸다. 한국과 미국의 선수 공급망이 통합되는 것을 넘어 한국의 야구인과 야구팬들이 미국의 야구를 직접적으로 경험하며 문화적 자극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앞선 야구 기술과 운영 방식을 배운 것은 오히려 작은 부분이었고, 집단이 아닌 개인, 팀이 아닌 선수의 관점에서도 야구를 볼 수 있는 통로를 발견한 것은 좀더 근본적인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변화는 동시에 국가의 직접적 개입에 의한 지원과 지역 대결 구도라는 창설 당시의 동력원이 퇴색해 가는데도 한국 야구가 대중적 인기를 유지하거나 오히려 더욱 확대해가며 성장한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2년 7월 19일, 화 4:08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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