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노근리 학살 "문제는 간단하다"고?

"Korea, it wasn't a police action. It was a war. That's simple" (한국 문제, 그것은 치안유지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전쟁이었다. 문제는 간단하다.)

위의 진술은 한국전 참전용사들과 그 가족들 및 관계 공무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지난 12일 탈라하시 주청사 인근 캐스캐이드 공원에서 벌어진 '한국전 참전용사비 제막식'에서 하우드 훠치(Howard Fuich) 주 하원의원이 행한 연설의 서두 부분읻.

이날 제막식의 전반부 의례 행사는 20세기 들어 크고 작은 국제 전쟁에 '빠지지 않고 뛰어들어' 승전을 거듭해온 미국인의 자존심을 한껏 높여주는 분위기가 팽배한 가운데 진행 됐다. 다소 무거운 분위기가 가라앉은 후, 이제 막 대표연설자들의 연설이 시작되어 '무슨 감동스런 말을 할 것인가' 숨죽여 주목하고 있던 필자는 훠치 의원의 이 느닷없는 발언에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못 들었나 싶어 슬쩍 빠져 나와 녹음기를 다시 돌려 들어 봤다. 그의 강경한 어조와 참전 군인다운 짧은 액센트가 뒷머리를 쨍하고 때려 왔다.

"It was a war. That's simple"

그랬다. 그것은 단지 전쟁이었다. 정말 귀찮은 전쟁이었다. '도라, 도라, 도라'로 시작된 진주만 공격에서 낮은 코의 동양인에게 호되게 당한 후, 두방의 원폭으로 '간단하게' 전쟁에 승리하고, 귀국날만 잡고 있던 미군들에게 한국전 참전 명령은 귀찮은 잡일이었다.

"또 왠 귀찮은 전쟁이냐! 저 짝달막하고 허접 쓰레기 같은 동양놈들, 깜둥이 만도 못해 보이는 동양놈들, 에라 모르겠다. 상부의 명령이니 그냥 갈겨 버리자!"

그들은 인디언 사냥하듯, 흑인들 두들겨 패듯, '힌 옷입은 사람들'을 그렇게 죽였다. 처음에는 모아 놓고 기총소사를 했고, 다음에는 굴다리속으로 피신한 어린아이, 여자, 노인들, 부상자 가릴 것 없이 '따콩, 따콩' 겨냥해서 3일동안 쏴 죽였다. 죽이라고 해서 그냥 죽였다. That's simple.

훠치 의원이 연설 맨 첫머리의 재담에서 늘어 놓은 대로 한국 겨울날씨만큼이나 제법 쌀쌀한 날씨에 열린 이날 제막식에서 그가 차갑게 보여준 '노근리 학살'에 대한 인식을 즉각 '야만'으로 단죄하기에는 20세기 하늘 아래 함께 숨쉬고 이리저리 엮어지면서 함께 살아왔다는 공범자의 죄책같은 것이 내부에 도사리고 있어 울컥 분노를 삼키는 정도로 감정을 정리해야만 했다.

그날 식장의 '신사 숙녀' 심지어는 몇 안되는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들까지도 "It was a war. That's simple" 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립박수를 쳐 댔다는 사실에 죄의 사슬구조 앞에서 인간 개개인의 도덕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를 다시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20세기는 이런 류의 대량몰살이 어느 세기 보다 많았던 '말세' 였다. 1914에 시작된 1차 세계 대전에서 8개국이 싸움을 벌여 5년만에 민간인까지 합해서 9백만 이상이 죽었고, 1939년에 시작된 2차대전에서는 27개국이 다시 패싸움을 벌여 7년여만에 6천만명이 죽었다. 한국전쟁때는 3년동안에 남북한 포함해서 한국인만 520만이 죽었고, 중공군은 1백만, 미군은 5만4천여명이 죽었다. 한국전쟁은 인류 역사상 단기간에 가장 많이 죽은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20세기의 '뭉텅이 살상'은 전쟁과 직접 관련이 있는 군인들 뿐 아니라 민간인들에 대한 대량학살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1.2차 세계대전과 동서 냉전기간 중 벌어진 20여개의 크고 작은 전쟁에서 벌어진 대량학살의 역사를 살펴보면 20세기가 바로 '말세'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히틀러라는 세기적 미치광이가 벌인 6백만명의 유태인 학살을 필두로 공산주의 소련치하에서 1천만명의 우크라이나인 인종학살, 유럽에서 2백만의 독일인 학살을 비롯 최근의 동티모르인 학살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뭉텅이 학살이 벌어졌다. 최근에 밝혀진 월남전 당시 미군의 '미라이 양민 학살' 한국군의 '디엔안 양민 학살' 등은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고 봐야 한다.

이러한 민간인 대량 학살은 '혁명' '자유와 평등의 쟁취' '민주주의의 수호' 등의 옷을 입고 'simply' 자행됐다. 그렇다. 이번 제막식에서 훠치 의원이 "It was a war. That's simple" 이라고 쉽게 말한 것은 바로 이 야만의 세기에서 야만을 먹고 살아온 결과에 다름 아닌 것이다.

어디 훠치의원 뿐이겠는가. 얼른 떠오르는 우리 땅의 '거창 양민 학살 사건' '제주 4.3 사태' 등에서 얼마나 '쉽게' 민간인을 죽였는지. 1980년5월18일 광주에서 전개된 '충정작전'에서도 우리의 군복입은 형제들은 '빨갱이니 무조건 죽여라' 해서 어떻게 'simply' 양민을 향해 총질으 해 댔는지를 보라.

이제 조물주 앞에 한없이 부끄러운 뭉텅이 살륙의 20세기가 막을 내리려는 찰나에 있다. 인간의 생명보다 정치 이데올로기, 종교적 신념, 집단 이익이 우선하도록 만등 허위의 의식구조에 속아 살아온 우리 동시대인들은 이제 이 야만의 세기를 어서 빨리 보내야만 한다.

베를린 광장에 모여 '게르만을 지배하려는 다윗의 별을 쳐 없애자'는 외침에 오른손 높이 들어 '하일, 히틀러!'의 합창을 불러대던 전체주의의 세기를 보내야 한다. 인간의 머리속까지 지배하려 들며 한 켠에선 '인민의 이름으로' 다른 한켠에선 '자유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고문을 자행하며 살육의 굿판을 벌이던 '빅 브라더'의 세기는 가야 한다.

아무리 전쟁이기로 양민을 파리 죽이듯 죽여 놓고 "It was a war. That's simple" 이라는 단세포적 강변에 기립 박수를 쳐대는 이 야만의 20세기는 가야한다. 야만의 세기여, 이제는 가라!


저무는 역두에서 너를 보냈다.
비애야!

개찰구에는
못쓰는 차표와 함께 찍힌
청춘의 조각들이 흩어져 있고
병든 역사가 화물차에 실리어 간다.

대합실에 남은 사람은
아직도 누굴 기다려
나는 이곳에서 카인을 만나면
목놓아 울리라.

거북이여 느릿 느릿
추억을 싣고 가라
슬픔으로 통하는 모든 노선이
너의 등에는 펼쳐있다.
(The Last Train /오장환)

(1999. 12. 22) / 김명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