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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시간: (EST) 2021년 9월 17일, 금 6:48 pm
[종교/문화] 종교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 탐구한 기독교사회윤리학자
[한국의 여성 신학자들] 강남대 백소영 교수①

(서울=뉴스앤조이) 강동석 기자 = 제도와 개인. 백소영 교수(강남대 기독교학과 초빙)는 자기 삶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로 두 단어를 꼽았다. PK(목회자 자녀)로 자라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라는 제도와, 그 제도 속 개인의 삶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목회 철학으로 교회 공간과 집은 분리되지 않았고, 오롯한 개인 공간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개인으로서 자유를 누리고 싶었지만, 교회 제도가 요구하는 이상적 인간상에 맞춰 살았다.

'어떻게 개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가.' 오래된 고민은 백소영 교수를 신학자의 길로 이끌었다. 백 교수는 자기 삶의 배치와 분리할 수 없는 교회에 대한 고민을 탐구하기 위해, 기독교학·사회학·윤리학 사이의 제휴 학문인 기독교사회윤리학을 전공했다. 그는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은 후, 미국 보스턴대학교에서 '한국의 무교회 운동'을 연구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모든 교인이 개별적 주체로서 신앙생활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대학 강단과 교회를 누비며 대중 강연과 저술 활동을 펼쳐 온 백소영 교수를 9월 21일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3시간 가까이 나눈 대화를 2편으로 나눠 게재한다. 이번 글에서는 PK로서의 삶과 고민을 비롯해 박사 학위를 받기까지 여정을, 다음 글에서는 △무교회 운동 △드라마 영성 △개신교 모성 담론 △기독교 페미니즘으로 정리할 수 있는 저술 활동과 여성 신학자로서의 생각을 담았다.


▲ 신학자이자 기독교사회윤리학자로서 대중 강연과 저술 활동을 이어 온 백소영 교수를 인터뷰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나.
아버지가 기독교대한감리회 목사였다. 허니문 베이비로 태어나 'PK'이자 'K-장녀'로 살았다. 결혼 직후 맡은 아버지의 첫 목회지는 강원도 원주시에서 한참 들어가면 나오는 간현리였다. 대부분의 첫째가 그렇듯, 부모님의 가난하고 고단한 목회 과정을 함께 겪었다.

아버지 목회 철학이 두 가지였다. 목사의 집은 교회 건물과 떨어져 있으면 안 된다는 것과 교인들이 24시간 드나들 수 있게 문 하나는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 목회자로서는 존경스러운 원칙이나, 가족에게는 힘들었다. 어린 시절 우리 집 식구가 총 몇 명인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집에 들락거렸다. 아버지는 청년부 목회를 오래 하셨는데, 어떤 청년은 2~3개월 함께 살았다. 우리 집에서 병치레를 한 청년도 있었던 것 같다. 항상 북적거리다 보니 나로서는 교회와 집의 경계가 불분명했다.

집에 있으면서 손님을 즉각 환영하고 환대하는 것을 기대받았고, 그렇게 배워 왔다. 그래서 겉으로는 즉각적으로 웃으면서 "어서 오세요", "앉으세요"라는 말이 나오면서도, 속으로는 '또 왔어?' 하는 저항이 있었다. 아무도 없을 때 혼자 방문을 걸어 잠근 채 독서하면서 책 속 세계로 빠져드는 것을 좋아했고, 그 시간이 행복했다.

교회와 가족, 내 삶의 터전이 분리되지 않는 상황이라 교회는 내게 '애증의 장소'였다. 심지어 나는 주일성수한 뒤 월요일 아침 7시 25분에 태어났다. 엄마가 토요일에 진통을 느꼈는데, 아버지가 "주일성수해야 한다"고 해서 하루를 참으셨다고 한다. 월요일 새벽, 소달구지 타고 원주기독병원에 갔더니 양수가 다 나온 뒤라 마른빨래처럼 낳았다고 하더라.

그러다 보니 자아가 교회 공간과 제대로 분리되지 않았다. 너무 붙어 있어서 도저히 떼어 낼 수 없을 정도였다. 수술 후 꺼내지 않아 오랜 시간 폐에 붙은 거즈와 같은 느낌이랄까. 호흡하려면 폐가 건강해야 하는데, 너무 오래 내 폐에 붙어 있어서 거즈를 떼면 조직까지 상할 것 같으니까 떼려야 뗄 수 없는 나 아닌 어떤 것. 그게 어린 시절 내가 생각한 교회였다.

- 집이 교회와 분리되지 않았던 것이 삶의 태도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 같다. 어렸을 적부터 붙잡았던 삶의 키워드가 있다면.
내 삶의 핵심 키워드는 '제도와 개인'이다. 나는 교회라는 제도가 규범화해 놓은 이상적 인간상에 맞춰 '모범생'으로 살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제도를 모범적으로 내면화한 사람은 자아가 제도와 혼연일체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개인'으로서 자아가 강했기 때문인지 속 알맹이는 제도를 싫어했다. 목사의 큰딸로서 목회에 도움이 돼야 하니 교회 제도가 원하는 인간상을 빨리 포착해 수행했지만, 사실 알맹이는 자유로운 인간이었다.

나를 얽매는 것들에서 도망가고 싶어 마음속으로는 끊임없이 짐을 쌌지만, 그게 표출되지는 않았다. 끊임없이 내 경계를 침범해 들어오는 타자들을 대하면서 '어디까지가 나일 수 있는가', 그것이 어린 시절부터 품었던 내 인생의 질문 중 하나였다. 지난해 내가 성서한국 전국 대회 주제 강연을 맡았을 때 '나-너-우리'라는 키워드를 꺼내지 않았나. '우리'라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 '나'는 '너'를 얼마큼까지 용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윤리·도덕적 원칙주의자인 아버지는 청교도 정신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교회 목사로서, 근면 성실하게 노력해 성취하는 것을 강조했다. 성취는 개인의 일을 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었다. 매년 프랭클린 플래너 같은 다이어리를 주셨고, 나는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기 위해 그것을 열심히 채우며 살았다. 하나님이 주신 네 안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라(maximize your potential)는 청교도적 메시지를 강조하셨다.
사모인 엄마는 여성 규범을 강조하셔서 매듭·자수·바느질 등을 배우게 했다. 엄마를 닮아 손재주가 있는 편이라, 칭찬을 받아 가며 신나게 배웠다. 그때는 이게 얼마나 분열적인지 몰랐다. 아버지가 강조해 온 잠재력을 극대화해서 '나'를 만드는 것은 근대적 주체로 가는 길이고, 엄마가 의도하신 것은 아니지만 여성의 덕목을 배운 것은 한 남자의 주체화를 돕는 '그림자' 역할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주체로서의 삶과 여성으로서의 삶이 이원화한 채로 강조됐는데, 결혼 전까지는 괴리를 못 느끼다가 결혼하니 분열 상황이 오더라.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하고 선생님이 가장 신뢰하고 예뻐했던 아이였다. '엄친딸'이라는 표현이 있던데, 친구 엄마들이 "소영이 봐라"고 말하고는 했다. 남들은 내가 뭐든지 빨리 적응하고 잘하는 것 같아 나더러 '빠르다'고 했는데, 스스로 돌아볼 때는 늦되다고 할 수밖에 없더라. 내면의 저항성이 50년 정도 표출되지 않고 있다가 뒤늦게 터져 나왔으니. 요즘 한창 친정에서도 시가에서도 저항하고 있다. 양가 부모님이 당황하는 중이다.(웃음)


▲ 백 교수는 자기 삶의 핵심 키워드를 '제도와 개인'이라고 말했다. 집과 교회가 분리되지 않는 환경 탓에 공동체 내에서의 삶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 모태신앙으로 자랐는데,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각하게 된 경험은 있다면.
다메섹 회심 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신자였지만, 그리스도인은 아니었다. 나도 꽤 오랫동안 그리스도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거의 태어났을 때부터 하나님의 존재는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었다.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굳이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데, 그것을 믿어야 구원에 이른다는 교리가 마술적으로 느껴졌다. '그걸로 다 된다고?' 많은 개신교인이 윤리적으로 무책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근거처럼 보이기도 해서 20대 때는 화가 나기도 했다. 예언자들이 이야기한 삶이 더 좋았다. '유대-기독교 세계관의 정수'가 예언서에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도 밖에 있으면 안 되니 겉으로는 그리스도인이라 했다.

그리스도인으로 자각한 시점은 보스턴대학교에서 박사 학위 종합시험을 준비하면서다. 현대신학 전체 범위에서 구두(oral)로 시험을 봤다. 여러 신학자 책을 공부하다가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를 읽는데, 그가 예수님을 'Jesus Christ'가 아니라 'Jesus as the Christ'라고 표현한 지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라는 고백이다. 둘이 어떻게 다른가 고민했다.

예수님을 두고 '맏아들 되신다'고 하지 않나. 둘째 아들도, 셋째 아들도, 이후로 아들들이 더 있는 셈이다. 물론 아들은 은유니까 딸들도 포함된다. 인간이 이 땅에서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 아들로 살 수 있는지 깨달아 살아 내셔서 승리하시고 부활하신 분을 예수 그리스도라 고백한다면, 우리도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살아간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이지 않나. 우리도 '성육한 그리스도'이신 맏아들 예수를 따라 살아간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일 수 있겠구나, 깨달았다.

신기하게도 시험에서 "너는 그리스도인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걸 어떻게 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나왔다. 열정적으로 대답하면서 마음이 뜨거워졌던 경험이 있다. 그러니까 시험 보면서 계시 체험을 한 셈이다.(웃음)

- 대학을 이화여대 기독교학과로 진학했다. 계기가 있다면.
어렸을 때부터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별의별 질문을 다 했다. 목사 딸이라는 이유로, 성경에서 이상해 보이는 것은 다 물어봤다. 어렸을 때는 모든 질문에 해답을 줄 수 없었다. 내게도 성경 텍스트는 큰 퀘스천 마크였고, 아버지에게 물어봐도 답이 안 나오는 질문도 많았다.

늘 기도했다. '제가 만난 하나님을 잘 설명하고 싶어요.' 하나님을 잘 설명하기 위해 신학을 전공하리라는 데 추호의 의심도 없었지만, 교단 신학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원서 넣기 직전에 고민했는데, 서울대 종교학과, 연세대 신학과,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서강대 종교학과 정도를 찍었다. 인문학적 토양 위에서 자유롭게 공부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성향상 가능성을 놓고 하나씩 제거하는 방식으로 의사 결정을 하는 편이다. 종교학과 두 곳을 가장 먼저 아웃시켰다. 여러 종교 중 하나로서가 아니라, 기독교에 초점을 맞추고 싶어서.

연세대 신학과, 이대 기독교학과로 좁혀졌는데, 교회에서 가깝게 지내던 분이 이대 장상 총장님과 동기·동창이었다. 원서 넣을 즈음에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장상 선생님은 눈을 반짝이시더니 "연대는 넣지 마라"고 말씀하시더라. "왜요?" 그랬더니, "연대는 남자를 키우지 여자를 키우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 말에 설득됐다. 선택지를 줄였더니, 이대 기독교학과만 남았다.

사실 세상 학문의 대접과 신학의 대접이 너무 달라 보여서, 대학원 가서 신학을 하기는 할 건데, 학부는 남들에게 괜찮아 보이는 것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의 자존심이었다. 당시는 한 학교를 정하고 3지망까지 전공을 적을 수 있었다. 또다시 선택지가 주어졌다. 1지망 영문과, 2지망 불문과, 3지망 기독교학과를 썼다.

원서 내기 전날 자다가 소리를 들었다. '첫 열매는 하나님께 드려라.' 매우 낯선 체험이었다. 꿈이었는지, 양심의 소리였는지. 벌떡 깨서 '이게 무슨 소리지?' 했다가 '양심에 찔렸나 보다' 하고 잠을 청했는데, 똑같은 소리를 3번 들었다. 나는 감성적인 사람이 아니다. 이성적으로는 지금도 확신이 없다. 양심의 소리였는지, 성경을 하도 읽어서 그랬는지… 다만 사무엘도 3번 들었다는 게 기억이 났다. '안 되겠다' 싶어 그 즉시 원서를 찢었고, 이후 1지망으로 '기독교학과'를 썼다.


▲ 백소영 교수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잘 설명하고 싶다는 생각에 신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 대학 생활은 어땠나.
대학 4년간 배운 학문이 너무 재밌었다. 어릴 때 해결하지 못했던 의문들에 가장 학문적인 대답을 들은 셈이니까. 덮어 놓고 "그냥 믿어"가 아니라서 정말 즐거웠다. 수업 때 들은 이야기가 재밌어서 수업 끝나면 바로 도서관으로 갔다. '불트만이 그렇게 말했단 말이야?', '바르트가 그랬어?' 하면서 원서를 읽고 확인했다.

이화여대가 여성주의 메카 아닌가. 페미니즘을 통해 속 자아가 품은 질문에 대해 못 들었던 답을 얻기도 했다. '제도가 담아내지 못한 목소리 중 압도적 다수가 여성 목소리구나' 확인할 수 있었고, 신나고 좋았다. 여성 페미니즘 스펙트럼은 다양한데, 당시 대중에 비친 '기독교 페미니즘'은 정현경 선생님으로 상징됐다. 매체의 한계겠지만 결과적으로 한 인물이 한 이즘을 대표하면서 교회 바깥으로 튕겨 나가는 과정을 보며, 기독교 페미니즘이 다양화하지 못하는 모습에 안타깝기도 했다.

대학 시절 제도적 고민도 여전했다. 내가 1968년생이고, 1987학번이다. 상징적 숫자 아닌가. 현재의 문명과 제도적 '당연(taken-for-granted)'에 저항했던 68혁명 시점에 태어났고, 한국이 민주화한 1987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도서관으로 달려갈 때 많은 선배가 나를 지탄했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광장이지, 도서관이 아니야." 당시 대학 공동체가 주는, 87학번 대학생으로서 이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제도적 초청이었다.

당시 도서관에 가면서도 고민했고 계속 질문했다. 공부가 나 자신만의 성취를 위한 개인주의적 회피인지, 아니면 선배들이 이야기하는 나라를 같이 이루기 위해 내 몫을 하는 건지. 내 답은 후자라서 당당히 도서관에 갔지만, 학생운동 격동기였던 그 당시 저항운동의 답은 하나였다. 어른들의 '당연'만큼이나 그들의 '당연'이 규범처럼 작동해 나를 억압할 때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 대학원에 진학해 기독교사회윤리학을 전공했다. 왜 진학을 했는지, 석사과정에서 어떤 것을 공부했는지 궁금하다.
더 공부할 생각은 없었다. 하나님을 설명하는 방식에 교수의 길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데 공부가 재미있어 몰두했던 결과로 수석 졸업을 하다 보니, 부모님 기대치는 높아졌고 교수님들도 '당연히 공부해야지'라고 조언하셨다. 부끄럽지만 대학원은 그렇게 밀려서 진학했다. 전공을 선택할 때 성서신학과 윤리학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제도와 개인'이 인생에서 가장 큰 질문이었던 터라 사회·제도의 규범이 어떻게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보는 사회윤리를 최종 선택했다. 내가 고민하는 공동체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겠다는 기대가 있었다.

석사 논문은 '아가페(Agape) 윤리 규범에 대한 여성해방론적 재해석과 그 적용'이었다. 교회에서 '자기희생'을 많이 이야기하지 않나. "너를 내어 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라고. 신적 사랑 아가페 윤리인데, 이를 여성에게 적용할 때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돌아봤다. 여성은 이미 제도 안에서 아가페 없이도 희생을 강요당해 왔다. 제도적 수행성·습관을 요구받는 여성에게 아가페를 적용하면 얼마나 자기 없는 희생이 되겠나.

내가 내린 답은 상호성, 상호애(Mutual Love)였다. 나를 내어 줄 수는 있겠지만, 상호 흐름에서 내어 줌의 사랑이 일어나야지 일방통행이어서는 안 된다. 희생하고 싶더라도, 주체로 완전히 서 있는 내가 너에 반응하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 '나'를 찾지 못한 여성이 제도나 공동체의 강요로 하는 희생을 아가페적이라 말할 수 없다고 썼다.
논문에서 다룬 구체적 윤리 적용 부분은 '아내 강간'이었다. 법제화가 안 된 시점이었다. 당시는 결혼 제도 안에서 부부 중 한 사람이 원할 때 반드시 성관계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처럼 인식됐다. '한 사람이 원할 때‘가 가부장제와 만나면 '남편이 원할 때'로 바뀐다.

그 문제로 고통당하는 여성을 많이 봤다. 부부 사이에서 성폭력과 폭력은 거의 같이 온다. 극한 상황에 처한 여성 집사·권사님들이 사택으로 찾아오셨다. 행색이 정돈 안 된 상태로 와서 부모님 없으면 13~14살인 나에게 막 울면서 털어놨다.
겨우 사춘기 언저리 소녀가 이런 이야기를 왜 들어야 하는지 당황스러웠고, 자기 연민에서 눈물이 났다. 그런데 내담자들은 외려 "목사님네 아이는 다르더라. 공감하면서 같이 울어 줬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내심 억울했는데, 그 경험들이 석사 학위논문 주제를 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할 줄은 몰랐다.

- 미국 유학은 어떻게 가게 됐나.
밀려갔다. 계속 '밀려 인생'이다.(웃음) 지도교수님이 유학을 권했다. 목회자 가정 자녀가 유학하면 교회에서 재정을 지원하는 경우도 있지 않나. 아버지는 그런 상황을 원천적으로 막았다. 고등학교까지만 학비를 내주셨고, 이후로는 알아서 벌어서 다니게 했다. 대학 1학년 때부터 성적 장학금을 받고 아르바이트하면서 공부했다.

그런데 당시 지도교수님이 내 성적을 갖고 보스턴대학교에 가서 학교와 담판을 보셨다. 장학금을 주라고 설득한 것이다. 학비 면제에, 미국 감리회 여선교회 '아시아 여성 지도자 양성 기금'으로 매년 6000달러를 지원받게 됐다. 엄청 많은 돈인 줄 알았는데, 학생 아파트 방세로 한 달에 425달러를 냈으니 매달 75달러로 살아야 했다. 부모님께는 차마 말씀을 못 드렸다. 정말 배고프게 3년을 혼자 버텼다.

융통성 있는 사람이었다면 아르바이트라도 했겠는데, 곧바로 박사과정으로 진학해 읽어 낼 책 분량만으로도 하루하루가 벅찼다. 그냥 굶는 쪽을 선택했다. 그래도 유학 생활은 즐긴 편이다. 아무도 나를 체크하지 않더라. 목사 딸로 보지 않으니까 신기하고 좋았다. 방에서 혼자 보내는 자유를 많이 누렸다.

- 유학 생활 도중 결혼한 것으로 알고 있다. 결혼은 어떻게 하게 됐나.
아홉수, 29세가 되니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외로움보다는, 유학 와 있는 아시아 싱글 여자를 대하는 방식에 지쳐 버렸달까. 사람들이 내 경계를 계속 흔들더라. 전략적으로라도 결혼해야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남편이 동갑인데, 남들과 가장 다른 방식으로 결혼할 수 있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둘 다 학문적 욕심이 강했고, 아이를 낳지 말자고 약속했다. 나는 학자가 되고 싶으니 서로의 경계를 되도록 건드리지 말자고.

결혼 후 남편 태도가 바뀌더라. 이걸 예상하지 못했다.(웃음) 나는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뭔가를 원하면 거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게 최대 약점이다. 양가 어른 네 분과 남편까지 모두가 더 늦기 전에 출산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아기를 낳은 뒤로는 계속 버티고 버티는 인생이었다.

- 육아하면서 학문을 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미국 생활 10년 중 5년을 공부, 5년을 육아로 잘라서 보면, 앞의 5년은 내 인생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제도로부터 자유로웠으니까. 뒤의 5년은 가장 어려웠던 시간이었다. 윤리 규범을 공동체 구성원과 함께 합의해야 하고, 구성원들이 행복해야 한다는 전제가 계속 나를 눌렀다.

학위논문을 쓰지 못한 채로, 남편 직장 따라 댈러스로 이사했다. 학교가 보스턴이라 떨어져 지낼 수 있었을 텐데, 가족들이 모두 반대해서 그냥 따라갔다. 여성주의적으로 봤을 때 불합리하다고 생각했고, 내 안에서 저항감도 일어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마음을 창자 속에 억지로 꾹꾹 눌러 담고 제도에 순응하는 삶을 또 선택한 셈이다.

가사와 육아가 오롯이 나에게 맡겨져 있어서 논문 쓸 시간은 밤밖에 없었다. 매일 "나는 시간 거지야"라고 할 정도로 시간이 없었다. 아기가 잠든 밤, 침실에 딸린 반 평짜리 빈 옷장에 들어가서 자지 않고 2시간씩 힘들게 글을 써냈다. 낮의 일상을 소화한 다음에 논문을 쓰는 게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었고, 그래서 둘째도 유산했다.

나는 미국에서 신앙생활할 때 자모실에 장난감을 많이 가져오는 애 엄마였다. 유아실·자모실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엄마가 되기 전에는 몰랐다. 그곳에 배치된 적은 없었으니까. 출산과 육아 이후에야 일상화한 여성 억압적 공간 배치를 느꼈다. 아이가 껌딱지처럼 정말 안 떨어졌다.(웃음) 물론 내 아이는 사랑스러웠고, 육아 경험은 나에게 또 다른 인격적·신학적 성장을 주었다. 하지만 이걸 24시간 풀타임으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 '한국의 무교회 운동'으로 박사 학위논문을 받았는데, 어떤 연유로 이 주제를 연구했나.
내게 교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애증의 장소이고, 살기 위해 갈이 갈 수밖에 없으니 교회를 이해하고 싶어 교회론을 쓰고자 했다. '개인·개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공동체로 살아갈 수 있는지' 다루고자 했다. 교회에서 개인들이 이기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나를 지키면서 공동체로 살아가려면 답은 그리스도에 기반해야 한다고 봤다.

논문을 쓰고자 글을 읽었는데, 서양 신학자들의 교회론은 별로 매력적이지 않았다. 당시 나는 토요일마다 하버드 옌칭도서관의 한국 자료실을 들렀다. 남북한에서 출판된 거의 모든 자료를 모아 놓은 공간이었다. 그 자체로 너무도 한국적인 아우라가 느껴지는 공간이라, 기운 자체를 즐기기 위해서라도 자주 들렀다. 그런데 한쪽에 가로가 아닌 세로로 답답하게 쌓여 있는 책 무더기가 보였다. <성서조선>이었다.

이름이 낯설면서 신기했다. 왜 성서와 조선을 붙였을까. 한 권 빼서 읽는데, 세로줄로 적힌 데다가 반은 한글, 반은 한자였다. 김교신이 <성서조선>을 시작하며 쓴 권두언을 겨우 읽었는데, 매료됐다. 가슴이 뛰더라. 성서와 조선이 너무 귀해 성서-조선 사이에 '와'도 붙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성서를 붙잡는 그리스도인의 실존, 조선을 붙잡는 조선인의 실존을 붙잡고 신학을 한다는 이야기가 무척 와닿았다. 갈 때마다 읽었다.

이분들이 말하는 무교회는 '교회 없음'이 아니다. 제도 교회에서 자유로운 본질적 '에클레시아'(ἐκκλεσία)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에른스트 트뢸치(Ernst Troeltsch, 1865~1923)는, 모든 종교 신앙은 종파적 자유로움에서 시작했다가 시간이 지나 제도화하고 나면 신앙의 핵심을 잃어버리고 껍질만 남는다고 했다. 제도화한 한국교회의 부정의를 현장에서 많이 보고 자랐지만, 껍질이 잘못됐다고 알맹이까지 버릴 수는 없으니 어떻게 알맹이를 잘 빼서 다른 집으로 옮길 수 있을까 고민했다.

무교회가 마치 민달팽이처럼 느껴졌다. 자신을 억누르던 집을 떼고 가겠다는 운동이라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무교회는 제도화한 교회주의, 율법주의적이고 바리새파 같은 주의를 없애려는 것이다. 물론 이상적이지만은 않다. 단점 중 하나는 남성 중심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일본의 경우 공동체성이 많이 약화하기도 하더라. 1인 1교회로 가기도 한다. 그런 지점에 실망하기도 했다. 나는 개인주의가 아니라 개인을 살리는 공동체에 관심 있었으니까.

- 논문 내용을 조금만 소개해 준다면.
보통 '무교회'는 김교신만 다루는데, 나는 김교신과 함석헌을 연결했다. 일반적으로 함석헌을 다뤄도 1945년 해방 이전까지만 무교회 운동에 넣고, 함석헌이 "나는 무교회주의자가 아니다"고 선언한 이후에 대해서는 별도로 연구해 왔다. 하지만 나는 가장 성경적이면서 원안에 해당하는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두 분의 답이 다르지 않다고 읽었다. 김교신과 함석헌은 동갑이지만, 1세대 김교신이 45세에 돌아가셨고 함석헌은 해방 이후 시대를 살았다. 나는 김교신 이후 함석헌의 주장과 실천을 두고 무교회 바통을 이어 간 2세대 인물이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와'도 생략한 이들에게서 굳이 성서와 조선을 분리할 필요는 없겠지만, <성서조선>이라고 했을 때, 1세대가 낯선 외국 종교 기독교를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는지와 관련해 '성서' 부분을 더 많이 살폈다면, 함석헌은 '조선' 부분을 더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함석헌은 해방 이후 공간에서 한국 현대사를 기독교 관점을 통해 비판적으로 성찰했다.

나는 무교회 운동에서 이 두 지점이 중요하다고 봤다. 두 세대를 관통하는 핵심 단어를 '초월적 역사의식'과 'ᄒᆞᆫ의 마음'으로 잡았다. 김교신이 일제나 교회주의에 포섭당하지 않고 일상 가운데서 신앙적 초월성을 붙잡고 살아 냈다면, 함석헌은 역사의식과 ᄒᆞᆫ의 마음을 사회적 실천으로 풀어냈다. 우리는 한국이라는 구체적 시공간에서 교회로 살아가기 위해 두 가지를 지녀야 한다. 제도에 갇히지 않으면서 역사 안에서 신앙을 살아 내는 초월적 역사의식, 그리고 분파주의를 넘어서는 ᄒᆞᆫ의 마음. 그래야 지금 이곳에서 기독교인이자 민족의 한 사람으로 살아 낼 수 있다고 봤다.

보스턴에서 나를 지도하신 정재식 교수님은 월터 뮬더(Walter G. Muelder, 1907~2004)의 제자로, 월터 뮬더가 은퇴하며 만들어진 월터뮬더석좌교수였다. 월터 뮬더는 공동체 안의 '개인들'이 어떻게 공동체를 이루어 가며 살아가는지 연구했다. 보스턴 인격주의 학파를 구성한 인물이다. 그가 내세운 개념이 'persons-in-community'다. 전체 안에 강압적으로 포획된 '사람'이 아니라 '개별자들'이라는 의미로 'persons'를 사용했다. 근대 자유주의적 '단독자'나 자본주의적 '이기적 개인'과는 구별된다.

함석헌도 씨ᄋᆞᆯ을 이야기할 때 한 ᄋᆞᆯ 한 ᄋᆞᆯ의 소중한 개체성을 인정하면서도 전체로서의 씨ᄋᆞᆯ을 강조한다. 함석헌의 씨ᄋᆞᆯ과 뮬더의 'persons-in-community' 개념이 잘 만나면서 내가 이해한 교회론으로 들어왔고, 논문에서 공동체 안에서 개인을 억압하지 않는 방식의 공존이 무엇인지를 풀었다.


▲ 1927년 <성서조선> 창간호 멤버 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김교신, 뒷줄 오른쪽이 함석헌.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 무교회 사상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어떤 통찰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제도 안에서 고쳐 쓰려고 노력해 봐도 안 되는 지점이 있다. 제도화의 정점에서 볼 때, 무교회 사상은 대안의 마지막 끝에 있는 선택지를 보여 준 게 아닐까 생각한다. 무교회주의자들은 제도로서의 교회는 버렸지만, 제도화의 대척점에서 '에클레시아' 즉 진정한 교회의 본령을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줬다. 끝과 끝을 알면, 개인의 선택지는 훨씬 넓어진다. 그 사이 어디쯤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위치를 선택하고 살아 낼 수 있다.

무교회 사상은 제도 안의 교인들에게 일종의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사상가들이 보여 준 초대교회 같았던 삶의 모습, 그 맑은 거울에 비춰 보면 우리의 추악한 모습이 많이 보일 거니까. 나는 무교회 원리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스스로 함, 배우고 또 배움, 그침. 반드시 무교회여야만 지킬 수 있는 원칙은 아니다. 제도 교회도 시도해 볼 수 있는 부분이라고 본다. 후기-근대는 하나의 영웅이 필요한 세상은 아니지 않나.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주체로 살면서 공동체를 합의해야 한다.

아직 한국교회는 몇몇 카리스마적 영웅 중심이다. 종교개혁한 지가 언제인데, 평신도가 주체로 서 있지 못하는 모습을 많이 본다. 그래서 '스스로 함'. 갇혀 있지 않고 계속해서 배워 나가는 '배우고 또 배움'. 더 이상 우리 껍질이 신앙을 담지 못할 때 '그침'. 무교회가 한국교회에 줄 수 있는 중요한 원리라고 생각한다. 개교회가 그쳐진다고 해서 그리스도가, 기독교가 그치는 것이 아닌데, 다들 둘을 구별하지 못하다 보니 제도적 타락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무교회는 '껍질만 남은 제도적 교회주의에 영원히 저항하는 교회 정신'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본보 제휴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0년 10월 30일, 금 4:39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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