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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고/에세이] 기고
 
민주주의가 꽃피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67세에 눈감아
[무위당 장일순평전 최종편] 원주 누옥에서 한낱 이름없는 선비로 생을 마치다


▲ 1956년 대성학교 설립 당시 교비 옆에서 찍은 29세의 장일순 선생. 선생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교육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동명의 학교를 세웠다. 이후 1965년 대성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나서게 됨에 따라, 당국에 의해 이사장 직을 사임했다. ⓒ 무위당사람들

(서울=오마이뉴스) 김삼웅 기자(전 대한매일신보 주필) = 무위당은 1990년부터 차츰 건강에 이상증후가 나타났다. 하지만 벌여놓은 일이 많았고 찾는 사람도 줄지 않아서 일상을 멈출 순 없었다.

이듬해 6월 14일 위암 진단을 받았다. 생과 사에 크게 괘념치 않는 성격이어서 원주기독교병원에서 수술을 받아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강연과 업무, 만남을 계속하였다.

1993년 3월부터 병세가 다소 호전되는듯하자 이현주 목사와 '노자 풀이'를 시작하고 강연도 다녔다. 9월부터 병세가 악화되면서 원주기독교병원에 재입원했으나 차도가 없어 10월 13일 서울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11월 13일에는 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로부터 투옥 인사들의 인권보호와 석방을 위해 노력한 공로로 감사패를 받게 되었다.

병세가 다시 호전되면서 1994년 2월 14일 세브란스병원을 떠나 원주기독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환중에서도 몇해 전에 선종하신 지학순 주교 기념사업회 구성을 지도하는 등 열정을 다해 평생의 동지이던 지 주교의 추모사업을 독려하였다. 추모사업회가 어느 정도 마무리될 즈음 다시 병세가 악화되었다.

무위당은 1994년 5월 22일 부인과 세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봉산동 자택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67세였다. 5일장으로 치른 장례식은 원주시 봉산동 천주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조문객 3.000여 명이 참석할만큼 성황을 이루었다.

생전에 무위당과 인연을 맺은 민주인사 다수와 한살림운동 관계자들을 비롯 많은 시민들이 참석하여 고인을 추모하였다. 흔한 훈장 하나 없는 장례식이었으나 여느 명사의 장례식 못지않는, 그러나 경건한 장례식이었다.

아침의 화려한 일출보다 황혼의 일몰이 더 아름다울 수 있고, 더욱 장엄하다는 것을 무위당의 죽음과 장례식이 보여주었다. 여러 사람의 추도문 중에 각별한 사이였던 리영희 교수의 「민주와 통일의 꽃 끝내 못 보시고」라는 추도문을 소개한다.


▲ 논길 옆 무위상 장일순 선생 묘소 ⓒ 박도

리영희 교수의 추도문

삼가 일속자 장일순 선생님의 영전에 바치나이다.

선생님은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서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라 군부독재와 싸워온 모든 동지ㆍ후학ㆍ후배들의 뜨거운 기도의 효험도 없이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야만적인 군부통치를 물리치고 이제 막 민주주의의 막이 열리는 순간에 선생님은 그토록 갈구하신 민주주의가 꽃피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가셨습니다.

슬픕니다. 원통합니다.

돌이켜 보면 선생님은 대한민국의 국가와 사회가 기꺼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고결하셨습니다. 병든 이 시대가 반기기에는 선생님께서는 너무나 올곧은 삶을 일관하셨습니다.

사악하고 추악한 것들은 목에 낀 가시처럼 선생님을 마다하고 박해하였습니다. 그럴수록 선생님이 계신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 929번지는 인권과 양심과 자유와 민주주의의 대의에 몸 바치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하나의 작은 성지였습니다. 진정 그러했습니다.

세상이 온통 적막하여 숨소리를 내기조차 두려웠던 30여 년 동안, 선생님은 원주의 그곳을 찾는 이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싸우는 전선에서 비틀거리는 자에게는 용기를 주시고, 싸움의 방법을 모색하는 이에게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회의를 고백하는 이에게는 신앙과 신념을 주셨고, 방향을 잃는 이에게는 사상과 철학을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공과 영예를 후배들에게 돌리시는 민중적 선각자이시고 지도자이셨습니다. 원주의 그 잡초가 무성한 집은 군부독재 아래에서 치열하게 싸우다가 지친 동지들이 찾아가는 오아시스였고, 선생님은 언제나 상처받은 가슴을 쓰다듬는 위로의 손을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한 시대를 변혁한 큰 업적과 공로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한 알의 작은 좁쌀(一粟子)로 자처하며 사셨습니다. 원주시 봉산동의 그 누옥에서 오로지 먹과 벼루와 붓과 화선지를 벗삼아 한낱 이름없는 선비로 생을 마치셨습니다. 참으로 고결한 삶이었습니다.


[저자의 덧붙이는 말] 고결한 삶, 참되게 살아온 장일순의 생애


▲ 무위당(無爲堂)과 좁쌀 한알의 호를 즐겨썼던 장일순 선생의 묘. “내 이름으로 되도록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1994년 5월 22일, 67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 무위당(無爲堂)과 좁쌀 한알의 호를 즐겨썼던 장일순 선생의 묘. “내 이름으로 되도록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1994년 5월 22일, 67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 ⓒ 최장문

무위당은 임종을 앞두고 평상심으로 죽음을 맞았다.

『노자』의 풀이,

死而不亡者壽(사이불망자수)
"죽어도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오래사는 것이다."라는 대목 그대로였다.

"오래 산다는 말은 육신을 두고 한 말이 아니지. 병원의 자리에 있는 사람한테는 육체의 삶이라는 게 하나의 꿈과 같은 것이거든, 생사가 모두 한 바탕 꿈인지라.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오래 산다는 것'은 영원한 삶을 말하는 거지."

무위당은 병상에서도 문병을 온 사람들에게 그림이나 글씨를 써주었다. 그중의 몇 편을 골라본다.

守本眞心知天地與我同根(수본진심지천지여아동근)
본래의 참된 마음을 지키면 천지가 나와 더불어 한 뿌리임을 깨닫는다.

君子數風雨之不移香(군자수풍우지불이향)
군자는 비록 비바람 속에 있더라도 결코 향기를 바꾸지 않는다.

蘭在幽谷不以無人不茫(난재유곡불이무인불망)
난초는 깊은 골짜기에 있어도 사람 없다고 향기를 내지 않는 것은 아니다.

水流元在海(수류원재해)
月落不離天(월락불리천)
물은 흘러가도 본디 바다 안에 있고
달은 져도 하늘을 떠나 있지 않다.

무위당의 심경을 보여주는, 모두 생과 사를 초탈한 경지의 글귀들이다. 자신의 내면적 자화상이며 정신적 상흔의 기록으로도 보인다.

무위당은 67세의 삶을 '00'하게 살다갔다.

따옴표 안에 무슨 글자를 넣을까, 한참을 망설인 끝에 조촐하고 깨끗함, 고상하고 순결함이라는 뜻의 '고결'이란 말이 떠올랐다. 그는 평생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도덕적인 순수성을 지키며 고결하게 살았다. 세속적 출세의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주류와는 격과 결이 다르게, 오히려 수렁으로 빠지는 쪽을 택하였다. 그러면서 고결하게 살았다.

그는 세상의 척도에 자신을 맞추기보다 정의의 가치와 자연의 이치에 자신을 맞춰가며 살았다. 한번도 사적인 이익을 위해 손을 대거나 자리를 탐하여 조직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신(神) 위에 올라선 물신주의와 위선으로 포장된 권위가 지배하던 시대와 치열하게 맞섰다.

그런 과정에서 자계와 자성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자신의 정신과 육신에 스며드는 허위와 세속의 때를 씻어내고자 부단히 노력하였다. 해서 정신의 명징함과 생활의 청빈함을 갖게 되었고, 체관이 아니라 달관에 이르렀다.

청년시절 교육사업을 시작하면서 '참되자'를 학교의 교훈으로 내건 이래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할 때에도 '참'의 가치를 버리지 않았다. 참되게 살고자 노력하고, 그렇게 살라고 가르치고, 그 가치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참의 가치관을 정립하였다. 참으로 참되게 살기 어려운 세상에서 그는 '참사람'이었다.

그래서 어느 철학자보다 웅숭깊고 절절할 수 있었다. 대화나 연설은 때론 객적고 넋두리가 담겼지만, 가식이 없고 수식이 없는 담백한 내용이어서 사람들을 애잔하게, 때로는 가슴 뭉클하게 이끌었다. 영혼이 순수한 사람에게서만 가능한 감동이었다.

무위당이 그렇다고 초월적인 성자이거나 도사 또는 고매한 성직자는 아니었다. 평범한 이웃이고 생활인이었다. 남과 다르기 위하여 남다른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찾고 본성대로 살고자 노력했다. 다르다면 당대와 후대를 위해 극한점으로 치닫는 물질문명 대신에 생태문명을 만들자는 생각을 갖고 작은 실천을 보였다. 국내외적으로 이런 생각, 이런 활동을 해온 사람도 없지 않았다.

무위당의 또 다른 특색이라면 틀에 박힌 것을 무시하고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그것도 도덕적인 품위와 순수성을 지키면서 걸었다는 점일 것이다. 어느 평자는 "제일 잘 놀다간 자유인"이라 하였다. 그는 자유인이었고, 그 자유는 도덕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의 길에는 동반자도 적지 않았고, 뿌린 씨앗도 많았다. 하여 동시대 세속의 '성공자'들이 앉았던 자리와 비교되고, "그이처럼 살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가치관의 새 지평을 열어보였다. 이 부분이 그가 남긴 가장 값진 유산이 아닐까 싶다. 고결한 삶만이 남길 수 있는 유산이다.


▲ 장일순 선생 생전의 모습. ⓒ 무위당사람들

조선후기의 학자 홍길주의 글에 이런 내용이 있다.

"문장보다 귀한 것은 몸을 지키는 위엄을 갖추는 데 있다. 지위가 낮아 미천하고 문장도 별반 놀랄만한 것이 없는데도, 가는 곳마다 존경받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지위가 위세당당하고 문장도 화려함을 갖추었는데도, 가는 곳마다 능멸과 업신여김을 받는 사람이 있다. 어째서 그러겠는가."

어째서 그럴까.

무위당은 높은 관직은 물론 책 한권 쓰지 않았는데도 가는 곳마다 존경을 받고, 사후 25년이 지난 지금도 그리워하고 따르는 사람이 줄을 선다. 왜일까?

지식인으로서 정직함과 엄격성, 불의에 맞서는 장렬함과 자신에 대한 청렬함, 시대를 앞서가는 정신과 방향을 제시하고 실천하는 모습에서, 시공을 넘어 사람들의 마음에 와닿기 때문일 것이다.

무위당은 일속자(一粟子)의 낙관으로 쓴 글씨에서 자신의 삶을 압축하고 있다.

萬古長空 一朝情華 (만고장공 일조정화)
영원한 시간과 공간에서 어느 아침 피어난 꽃.


그동안 읽어주신 모든 분들게 감사드리고, 많은 자료를 보내주신 '무위당사람들'의 김찬수 이사님께 고마운 말씀 드립니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0년 12월 22일, 화 7:17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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