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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고/에세이] 기고
 
유복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김재규 평전 3회] 의협심과 정의감이 강한 소년


▲ 선산읍 이문동 김재규 생가 안채 ⓒ 박도

(서울=오마이뉴스) 김삼웅 기자(전 대한매일신보 주필) = 김재규는 1926년 3월 6일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 이문동 687번지에서 아버지 김형철(金炯哲)과 어머니 권유금(權有今) 사이의 3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던 때는 일제의 식민통치가 극악스럽게 진행되던 시기였다. 조선총독부가 남산 기슭의 구통감부 건물에서 경복궁의 새청사로 이전하면서 한껏 기세를 올렸다. 매국노 이완용이 죽었고(2월 11일), 만해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이 간행되었으며, 6ㆍ10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발표되고, 이를 게재한 잡지 『개벽』이 폐간되었다.(6월)

암울했던 시기에 김재규는 아버지의 노력으로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선대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공조판서를 지낸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18대 후손이다.
김문기는 1456년 성삼문ㆍ박팽년 등이 주도한 단종복위 계획이 김질에 의해 밀고 되어 모두 주살당할 때, 그도 능지처살 당하였다. 그뒤 여기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 6인의 절의를 들어 '사육신'이라 하였는데, 이 사육신의 사실은 남효온(南孝溫)이 쓴 『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六臣傳)」에 성삼문ㆍ박팽년ㆍ이개ㆍ유성원ㆍ유응부ㆍ하위지 등 6인이 실리면서 김문기는 여기에서 빠졌다.

그뒤 1691년(숙종 17)에는 조정에서 공인하여 6신을 복관시키고, 이어 1731년(영조 7) 김문기도 복관되었으며, 1757년 충의(忠毅)란 시호가 내려졌다. 김재규의 문중에서는 선대 할아버지 김문기의 절의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김재규도 사석에서는 가끔 충의공에 대한 얘기를 하였다고 한다.

백촌은 김알지 후손으로 당대에는 본관을 김해(金海)로 사용하였으나, 후손들은 김수로왕의 후손인 김해김씨와 구별하기 위하여 금녕(金寧) 김씨와 경주(慶州) 김씨로 사용하는 두 파로 갈렸다. 그래서 김재규의 선대들은 금녕김씨로 불려왔다.

김재규의 할아버지는 선산면 독동에서 살았는데, 할아버지 사망 후 아버지가 이문동으로 이주하여 이곳에 자리잡았다.

친족들의 증언을 종합, 재구성해 본 그의 부친의 생애는 다음과 같다.

김형철은 친척이 외상으로 마련해준 논 다섯마지기를 기반으로 살림을 시작했는데, 어릴 때부터 진취적이었던 그는 17세 때 부인과 누이동생을 데리고 일본에 건너가 고생 끝에 살림의 기초를 다졌다.

당시 제사공장 감독으로 일하던 친척의 후임으로 일본생활을 시작한 김형철은 무식한 일본사람보다 더 잘 한다고 소문난 일본어 실력과 근면성으로 귀국하기 전에 벌써 이문동에 작은 집과 약간의 토지를 마련했다. 김재규가 태어난 이 이문동집은 후에 도로 확장으로 없어졌고 지금은 작은 공터만 남아 있다. (주석 1)

김재규의 아버지는 16세에 결혼하고, 결혼한 지 1년 만에 부친이 사망하면서 어머니와 일곱 동생을 봉양하는 소년 가장이 되었다. 그래서 일거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김형철은 정직하고 근실해서 뒤에 공장 감독이 되었고, 이때 번 돈으로 귀국해서 선산에서 토미업(벼를 사서 현미를 뽑는 일종의 정미업으로서 토미를 일본에 수출했음)을 했다. 토미업이 날로 번창해 가면서, 김형철은 누에고치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누에고치실을 풀어서 일본에 수출하는 사업이 왕성해지자, 양(兩) 사업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토지를 크게 구입했다. 김형철이 소유했던 전답의 규모는 한때 논이 100마지기, 밭이 50마지기(해방 후 이승만 정권 때 토지개혁으로 최고 한도인 50마지기만 소유하게 됐음)에 이르러 당시 선산군에서 몇째 가는 부농이었다. (주석 2)

김형철은 대단히 배포가 큰 인물이었다. 마을에 대지 600평, 건평 80평 짜리 집을 짓고, 그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집안에 목욕탕을 만들었다.

일본 순사에 대든 활달한 골목대장

김재규의 아버지는 그 시대 일반 지주들과는 많이 달랐다. 지주로서 자수성가한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모습을 보였다. 교육사업에도 많은 기여를 하고 각종 사회사업에도 나섰다.

그는 선산수리조합 이사를 역임하고, 감천강 제방을 쌓는 데 기여했다. 학원사업도 활발히 전개했는데 선산군의 유지들을 찾아다니며 모금하여 선산중ㆍ고등학교를 설립했고, 곧이어 선산여자 중ㆍ고등학교를 설립하는데 부지 12,000평을 희사했다. 이와 같은 각종 사회사업 활동을 인정받아 김형철은 한때 선산군 치안대장으로 선출되기도 했고 군민들 사이에서는 선량하고 인심 좋은 모범 유지로 통했다. (주석 3) 김재규는 담대한 아버지와 근면한 어머니의 유전자를 타고나서인지 매우 활달하고, 자라면서 골목대장 노릇을 하였다.

동네의 유지이자 마을에서 손꼽히는 큰 집의 장남인 김재규는 유년시절을 아무 구김살없이 보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동네소년들이 그를 많이 따랐고, 병정놀이에서는 대장노릇도 했다고 한다. 썩 뛰어나지는 못하나 남에게 빠지지는 않는 언변에 정의감과 의협심이 강하고 거기에다가 가정환경에 힘입어 별로 크지 않은 몸집에도 골목대장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는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친족들도 김재규의 유년시절에 대해 별다른 기억을 하지 못하는데, 어릴 때부터 고집이 세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한번 하고자 한 일은 꼭 해야 했다는 것. 한 친족의 회고,

"재규가 특히 말썽을 부리거나 속을 썩이지는 않았지만, 고집은 대단했어요. 한번은 재규의 모친이 사용하는 배틀의 작대기를 빼서 팽이채를 만들려고 한 모양이에요. 모친이 못하게 혼을 내니까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하니 죽어버리겠다고 허리끈을 풀어 살짝 대문에 목을 맸대요. 키가 커서 목이 졸리지는 않았는데 그런 꼴로 서 있는 것을 본 할머니가 대경실색, 기절했다고 하더군요." (주석 4)

김재규는 8세 때인 1933년 4월 1일 선주보통학교(현 선산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붓글씨를 잘 써서 상을 타고 달리기도 잘했으나 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아니었다. 그가 아직 철부지이던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한반도는 일본군의 군수물자 조달처가 되어 극심한 통제와 수탈이 자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어린 김재규는 구김살없이 성장한다.

어린 재규는 어머니의 영향 탓인지 가정 생활에서 여성적인 면을 많이 보였다. 집 밖에서는 사내다웠지만 집 안에서는 여자아이처럼 섬세하고 질서정연했다. 재규의 이런 이중적 성격은 그의 전 생애를 지배했는데, 사회의 정의를 위해서는 불칼과 같았으면서, 평소 생활에서는 다정다감하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남에게 잔정을 많이 베풀었다.

어린 재규는 집안에서 책상, 의자, 이불, 방석 등을 정돈하는 일을 즐겨했고, 집안의 물건들이 제 위치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지 않을 때는 화를 내곤했다. 자신의 몸가짐도 언제나 단정했다. (주석 5)


▲ 건설부장관 시절(1974~1976년)의 김재규. ⓒ 국가기록원

김재규는 정의감과 의협심이 강한 소년으로 성장한다. 초등학교 시절의 비화 한 토막이 전한다. 뒷날 10ㆍ26 관련 재판 중 변호인들이 제출한 내용이기도 하다. 그의 성장과정과 성격의 일면을 보여준다.

초등학교 4학년(당시 12세) 때의 일, 어느 날 책보를 메고 집에 돌아가던 중 시장 장막나무전에서 일본인 순사가 나뭇꾼을 발길질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사연을 알아보니 15전 하는 나뭇짐을 5전에 팔라고 순사가 강요, 위세에 눌린 나뭇꾼이 그렇게 하자고 했는데, 또 자기집까지 운반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못하겠다고 하니 순사가 화를 내고 발길질을 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순사들의 위세를 생각하면 있을 수 있는 풍경일 수도 있었지만, 이것을 보고 있던 김재규는 어린 가슴에도 의분을 참지 못해 순사에게 삿대질을 하며 "이 순사는 도둑놈이다"라고 대들었다고 한다. 순사는 나뭇꾼은 제쳐두고 어린 김재규를 잡아다 주재소 유치장에 넣었는데, 부친의 수습으로 풀려나왔다고 한다. 이때 그의 부친은 "네가 한 일은 옳다. 그러나 남자는 참아야 할 때는 참을 줄도 알아야 한다"라고 타일렀다 한다. (주석 6)

주석
1> 김대곤, 『10ㆍ26과 김재규』, 111쪽, 이삭, 1985.
2> 오성현, 『비운의 장군 김재규』, 13~14쪽, 낙원사, 1995.
3> 앞의 책, 15~16쪽.
4> 김대곤, 앞의 책, 112~113쪽.
5> 오성현, 앞의 책, 19쪽.
6> 김대곤, 앞의 책, 113쪽.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1년 2월 05일, 금 4:27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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