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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고/에세이] 기고
 
조선경비사관학교서 박정희와 만나
[김재규 평전] 운명의 갈림길에 들어선 조선경비사관학교 입교

(서울=오마이뉴스) 김삼웅 기자(전 대한매일신보 주필) = 김재규는 1939년 3월 선산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중학교 진학의 길이 막혔다. 학업성적이 반에서 10% 안에 들어야 중학진학이 가능했는데, 그의 성적은 학급에서 중상정도였다. 부모의 실망이 컸다. 지역 유지의 체면에 말이 아니었다. 김재규도 생애 최초로 자존심이 상하는 상처를 입었다.

아버지가 일본 유학으로 면치례의 길을 찾았다. 그렇게 하는 유지들이 없지 않았다. 초등학교 동기인 임명수와 함께 15세 소년 김재규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중야무선전신학교에 들어갔다. 일본에서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무선전신학교의 과목도 적성에 맞지 않았다.

어느날 일인학생과 싸우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초등학교 4년 시절 일본인 순사에게 삿대질을 했던 항일정신의 발로였는지, 단순 폭력사건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를 계기로 2년여 만에 귀국한다. 그리고 1941년 4월 5년제의 안동농림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경북 북부지역 유일한 중등교육기관인 이 학교는 입학경쟁률이 치열하여 평균 10대 1이 넘을 만큼 입학이 쉽지 않았다. 전하기로는 면접 시험장에서 김재규의 불온한 답변으로 불합격되었는데 아버지가 이 학교 교사를 사위로 둔 선산우체국장인 소림에게 부탁하여 그의 사위 허구찌 선생이 보증서를 쓰고 가까스로 입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주석 7)


▲ 박정희와 김재규(오른쪽), 그리고 차지철(왼족) ⓒ 박도

김재규가 뒤늦은 나이에 안동농림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조선총독부는, 내선일체를 이루고 조선인이 받는 불이익을 없애기 위한다는 허무맹랑한 명분으로 창씨개명을 실시하였다. 중학에 들어간 김재규는 김본원일(金本元一)로 개명하고 공부하였다. 학교성적은 그리 좋지않은 편이었다.

1학년 석차가 110명 중 100등, 2학년 때가 106명 중 87등이었다. 1학년 때 80점이 넘는 과목은 영어(85점), 식물(81점)이었고, 제일 점수가 낮은 과목은 교련(65점), 2학년 때는 조림삼림보호 과목이 제일 성적이 좋았는데(75점) 물리, 생물 등 과학계통의 성적이 나빴다.

결석도 많아 1학년에 27일, 2학년에 15일이나 됐다. 3학년에 올라가서는 성적이 점수로 표시되지 않고 수우미양가로 나왔는데, 영어에서 수를, 대수와 교련에서 가를 맞았다. (주석 8)

결석이 많았던 것은 어렸을 때부터 중이염을 크게 앓아서였던 것 같다. 그대신 급우들과 우정과 의리를 소중히 여기고 노래와 유머도 뛰어나 따르는 친구들이 많았다. 안동농림학교 다닐 때 줄곧 낙동강 건너편에 사는 급우의 집에서 하숙을 하고 급우의 어머니를 친어머니처럼 살뜰이 모셨다. 뒷날 그가 보안사령관 시절까지 명절마다 찾아 문안을 드렸다고 한다.

김재규가 뒤늦게 들어간 학교였지만 졸업하지 못했다. 4학년으로 진학할 때 일본군의 특별간부후보생으로 선발되었다. 일제는 1943년 3월 1일 징병제를 공포하고 10월 20일 학병제를 실시했다. 대학, 전문학교, 고등학교 재학생 중 학도병에 지원하지 않는 학생에게 징용영장을 발부하고, 중추원에서는 학도병에 지원하지 않는 학생은 강제로 휴학시켜 징용하기로 결정했다.

조선경비사관학교 입학

김재규는 시대의 격랑에 따라 안동농림학교 3학년을 마치고 4학년에 진학하던 해에 일본군 특별간부후보생으로 선발되었다. 지원한 것인지, 징집된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의 학적부 4학년 란에 '특간(特幹) 채용으로 졸업인정'이라 적혀 있어 지원과 징집을 판별하기 어렵다.

특별간부후보생으로 입대한 김재규는 일본으로 건너가 훈련을 받았다. 52비행사단에서 비행사 훈련을 받았는데, 배속된 곳이 카미카제(神風) 특공대 훈련부대였다.

일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람이 탄 비행기 동체로 적함(연합국 함대)을 들이받게 하는 자살특공대를 설치 운영하였다. 카미카제 특별 공격기는 기체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이착륙용 바퀴를 없애고 기체에는 250Kg 정도의 폭탄을 실었다. 이들이 출격할 때는 기름도 왕복이 아니라 항공모함까지 가는 편도용만 제공되어, 적함을 폭파할 때 기체와 함께 부딪혀 죽이는 자살용이었다.

일제는 1942년부터 패전 때까지 평균연령 20세 정도인 지원병들을 모집하여 단기 훈련 끝에 3,000명이 넘는 청년들을 카미카제 자살특공대로 내몰았다. 김재규는 훈련 과정에 일제의 투항으로 용케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김재규의 얄궂은 운명은 당시 일본 제1항공사령관이던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의 휘하 부대에 배치된 것이다. 이은은 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1907년 일제가 고종을 퇴위시킨 뒤 이복형인 순종을 왕위에 올리면서 황태자의 신분이 되었다.

그러나 초대 조선통감이 된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황실을 절손시킬 계략으로 그를 1907년 일본으로 끌어가 볼모로 삼고, 1911년 일본 육군유년학교에 입학시켰다. 이후 그는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일본의 왕족 나시모토 마사코(梨本宮 方子)와 정략 결혼시켰다. 이은은 일본 육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1940년 육군중장이 되고 1943년부터 일본의 제1항공군사령관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김재규에게 행운이 따랐다. 임관되기 6개월 전에 일제가 패망함으로써 카미카제 특공대의 자살참극을 막아준 것이다. 해방을 맞은 그는 1945년 8월 귀국하여 9월에 경북사대 중등교원양성소를 나와 1946년 3월까지 6개월간 김천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1947년 8월부터 1948년 6월까지 대륜중ㆍ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김재규가 일본에서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몹시 앓고 있었다. 척추 디스크였다. 아버지는 장남의 결혼을 서둘렀다. 마을에서 30리 쯤 떨어진 산동면에 사는 친구의 딸을 며느리감으로 점찍었다. 아들은 아내가 될 여성의 얼굴도 한 번 보지 못한 상태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김재규는 이런 아내가 맘에 들지 않았다. 정이 없는 결혼생활이 10년간이나 유지되었다.

김재규의 교사직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학구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적성에 맞지 않는 교사와 정분이 없는 아내를 피하는 길이 군문에 입대하는 것이었다. 1946년 9월 24일 조선 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한다.

이에 앞서 같은 해 5월 1일에 1기생 89명이 3개월 만에 졸업하고, 제2기생은 국사ㆍ수학ㆍ영어 등 필기고사와 면접ㆍ신체검사를 거쳐 263명이 선발되었다. 1기생은 초창기라 여기저기서 끌어 모았으나 2기생은 치열한 선발과정을 거쳤다. 해서 2기생들은 자부심이 대단했다.

출신 배경을 보면 광복군ㆍ중국군ㆍ만주군ㆍ일본군 등의 장교가 30여 명, 하사관이 50여 명이었고 나머지는 민간 출신이었다. 중국 텐진에서 46년 6월에야 귀국선을 탈 수 있었던 박정희(만군 중위) 전대통령과 만주에서 우여곡절 끝에 46년 3월 역시 뒤늦게 귀국한 석주암(만군 대위), 이규동(만군 경리관), 윤태일(만군 중위) 장군 등이 무리지어 입교했다.

그 중 윤태일장군은 입교 얼마 후 신병으로 퇴교, 나중 7기로 재입교해 2기 아닌 7기가 됐다. 일군 경력자론 학병 출신의 한신ㆍ이규학ㆍ서강철ㆍ김희덕 등과 지원병 출신의 문형태ㆍ이재식ㆍ김재명, 공국진 등이 대거 입교했다. (주석 9)

김재규가 운명의 갈림길에 들어선 것은,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에 들어가고, 여기서 박정희를 동기생으로 만난 일이다. 박정희와 인연으로 5ㆍ16 쿠데타 이후 승승장구하고, 결국 그를 살해함으로써 한국현대사의 물굽이를 바꾸는 '은원의 관계'가 되었다.

박정희는 김재규의 이웃 면인 경북 선산군 구미면(현 구미시)에서 1917년에 태어났다. 박정희는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재직중이던 1940년 4월, 일제가 세운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했으나 자격이 미달되자 '진충보국 멸사보국'이라는 혈서를 써서 입학하였다. 당시 만주군관학교의 관례로 우등생에게 일본 육사에 유학하는 특권이 주어졌는데, 그는 이 특전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되었다.

일본 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박정희는 소만 국경지대의 관동군 23사단 72연대 등에서 복무 중 일제의 패망으로 귀국했다가 조선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하게 되고, 여기서 김재규와 만나 동기생이라는 '우정'과 '악연'을 맺게 되었다.

조선경비사관학교는 1946년 4월 30일 군사영어학교가 폐지되자 같은 해 5월 1일 서울 태릉에 이 학교를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경비대 간부를 양성하였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9월 1일을 기해 조선경비대가 대한민국 국군으로 편입되자 조선경비사관학교는 육군사관학교로 개칭되었다.

<주석>
7> 오성현, 앞의 책, 33쪽.
8> 김대곤, 앞의 책, 114쪽.
9> 장창국, <육사 졸업생> 90쪽, 중앙일보사, 1984.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1년 2월 18일, 목 5:25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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