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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경제
 
'빨갱이'로 몰려죽은 초등학교 교사, 그 학교에 부임한 교사 아들
[기억전쟁] 한국전쟁 부역혐의자 이기성과 전 예산교육장 이병학의 삶과 꿈


▲ 이기성(이병학의 부친) ⓒ 박만순

(서울=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 "계시오?" "네. 누굴 찾아오셨어요?" "자네가 이기성 선생 아들인가?" "네. 그렇습니다" "....."

지팡이를 짚고 온 초로의 신사는 16세 농투산이(농투성이) 이병학의 손을 꼭 잡고 "자네가....."라며 뒷말을 잇지 못했다. "이기성 선생 아들이 농사꾼이라니..."라며 끝내 눈물을 흘린 이는 풀무학교 공동설립자인 주옥로였다.

공부보다 일을 더 많이 했던 풀무학교

홍성중학교를 졸업하고 가정형편 때문에 상급학교에 진학할 엄두를 못 냈던 이병학은 이렇게 해서 1965년 4월 풀무학교에 입학했다. 풀무학교는 1958년 충남 홍성군 홍동면에 주옥로·이찬갑이 농촌지도자 양성과 농촌교육공동체를 꿈꾸며 세운 비인가 학교였다.

풀무학교 공동설립자인 이찬갑(1904~1974)은 평북 정주군 출신으로 무교회주의 운동가이다. 독립운동가이며 오산학교 설립자인 이승훈 선생의 조카 손자이며 역사학자 이기백과 국어학자 이기문이 아들이기도 하다.

주옥로는 해방 후 홍동초등학교 교사를 지냈고, 풀무학교를 세우는 데 주춧돌 역할을 했다. 그는 쌀 세 가마를 주고 폐업 상태였던 방앗간을 사들인 다음 방앗간 목재를 뜯어다가 학교 짓는 데 썼다.

왜 주옥로 선생은 이병학을 찾아가 '풀무학교에 오라'고 했을까? 더군다나 개학한 지 한 달이 지난 4월에 말이다. 이병학의 아버지 이기성은 주옥로와 함께 1946년부터 1949년까지 홍동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있었다. 옛 동료 교사의 아들이 고등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농사짓는다는 소문을 들은 주옥로가 뒤늦게 이병학을 찾아가 직접 입학을 시킨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병학이 책보를 메고 2km를 걸어 풀무학교에 다니게 됐다. 하지만 학교는 그가 상상한 것과는 달랐다. 한 학년에 1개 반으로 전교에는 반이 3개뿐이었다. 교실은 흙바닥에 책걸상과 칠판이 전부여서 6.25 피난 시절 부산의 '임시 학교'를 연상케 했다.

풀무학교 교사 월급이 형편 없어 대학 졸업자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농촌교육공동체를 꿈꾼 젊은 선생들인 유달영, 홍순명이 풀무학교를 지켰다. 국어시간에는 재건국민운동본부 본부장을 역임한 유달영과 <씨알의 소리> 발행인 함석헌 등 저명인사가 쓴 글을 읽어주기도 하고, 그때그때 프린트물이 준비되었다. 즉 교과서가 없었던 것이다. 음악은 인근 교회 전도사가 와서 찬송가를 가르쳤고, 과학은 방학 때 대학생들이 농활(농촌봉사활동) 와서 가르친 게 전부였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학교에서의 노동이었다. 풀무학교가 개교한 지 7년이 지났지만 운동장에서 자갈 골라내는 것부터 학교 건물 신축, 정비에 이르기까지 일은 끝이 없었다. 오전에만 수업을 했고 그후에는 전교생이 노동에 동원됐다. 전교생이 지게에 삽과 낫을 얹고 등교할 정도였고 오후에는 학생들이 지게를 지고 흙과 나무를 나르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그러다 보니 홍동면에서는 풀무학교 학생들을 '똥통학교 학생'들이라 놀렸다.

이병학이 풀무학교에 가려면 면소재지의 홍동천을 지나가야 했다. 하지만 그는 친구들의 놀림을 받기 싫어 학교 다니는 3년 동안 한번도 그 길을 지나지 않고 먼길로 돌아다녔다.

인공 시절 교사였다는 이유만으로...

일제강점기 말인 1940년대 초 홍성군 홍동면에서는 청주이씨 소종회가 열렸다. 청주사범에 합격한 집안 사람 이기성의 지원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기성이가 청주사범에 합격한 것은 우리 집안의 영광이요. 많지는 않지만 우리 종친회에서 입학금 일부를 지원합시다"는 제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이기성의 형 이기혁도 결단을 내렸다. 면서기 월급이 20원하던 시절인데 청주사범 입학금이 200원이었다. 농사꾼에겐 무척 큰 돈이었지만 입학금만 내면 기숙사와 수업료가 면제였기에 이기혁은 빚을 내 동생 기성의 입학금을 마련했다. 6.25 때만 해도 중학교 진학은 시골에서 교사 같은 공무원이나 양조장, 방앗간 집안에서나 가능했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말해 무엇하랴.

그렇게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은 이기성은 청주사범을 나와 1946년 홍동초등학교 교사가 됐다. 그러다가 큰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가 낮에는 교사 생활을 하고 밤에는 건국대학교 내 정치대학을 다녔다. 그러다 6.25가 터졌다. 이기성은 가족을 이끌고 걸어서 홍성까지 내려왔다. 당시 집 나이 2세였던 아들 이병학은 너무 힘들어 죽음 직전까지 갔다.

얼마 후 국군이 퇴각하고 인민군이 홍성에 진주했다. 인공 시절 인민군은 이기성에게 홍동초등학교 교사를 하라고 시켰다. 그런데 국군이 다시 돌아오자 이게 부역행위로 문제가 됐다. 이기성은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홍동지서에 자기 발로 찾아가 자수했다. "초등학교 교사는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닙니다. 북한군이 하라고 강권해서 할 수 없이 한 일입니다."

하지만 해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이기성은 인공 두 달 동안 홍동초등학교 교사를 한 게 '죽을죄'가 되어 1950년 11월 2일 충남 홍성군 홍동면 월현리 석산봉 기슭에서 학살당했다. 그의 나이 27세 때로 같은 마을 사람 이기생과 허군도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한겨울에도 홑저고리 입고 살아

1950년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이기성의 아내 이명화에겐 더 그랬다. 홍동지서 경찰들은 남편을 끌고 가 죽인 것도 모자라 집안물건을 전부 빼앗아갔다. 곡식, 이불, 옷, 살림살이를 전부 가져가 이명화의 홑저고리, 홑치마와 이병학의 기저귀만이 남았다. 한겨울에도 땔감이 없어 모자가 꼭 껴안고 긴 밤을 보냈다. 이명화의 손발은 동상에 걸려 푸르딩딩했다. 돌이 갓 지난 이병학이 피난길에 이어 두 번째로 죽을 뻔한 시절이었다. 때문인지 그는 다섯 살이 되도록 걷지를 못했다.

이명화가 품팔이를 하고 큰집에 가서 일손을 도왔지만 그저 하루하루 연명하는 수준이었다. 다행히도 큰아버지 이기혁이 초등학교, 중학교를 보내주었지만, 이병학이 중학교 3학년 때 큰아버지마저 파산했다. 이병학이 상급학교에 갈 꿈도 꾸지 못하고 집안일을 돕고 있던 터에 아버지의 동료 주옥로가 찾아온 것이다. 말 그대로 '구세주'였다.


▲ 증언자 이병학(이기성의 아들) ⓒ 박만순

당시 풀무학교는 비인가학교였기에 검정고시를 봐야 고등학교 학력을 인정받았다. 이병학은 검정고시를 위해 홍성고등학교 다니는 친구들에게 국어, 영어, 수학, 과학책을 빌렸다. 수학을 빼고는 무조건 암기했다. 음악 시험 준비를 위해서는 '아리랑' 담배 3갑을 사갖고 홍성중학교 음악교사 최청산을 찾아가 3일 동안 음정 이론, 조바꿈 등을 배웠다. 현재 충남대학교 병원 자리에서 검정고시 시험을 봤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다음 목표는 공주교대 입학이었다. 이병학은 4.5: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장학생이 되기 위해 죽어라 공부만 했고 1970년 8월 31일 공주교대를 졸업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이 나지 않았다. 그는 주옥로를 찾아갔다. "신원조회에 걸린 것 같네. 내 알아봄세"라고 한 주옥로가 힘을 써, 홍동지서장이 인우보증서를 써줬다. '아버지가 부역자로 처벌되었으나, 아들 이병학은 근면 성실하여 교육계에 촉망되는 인물'이라고 읍소한 것이다.

또 대전고등학교 이종호 교장도 교육감에게 편지를 했다. 드디어 1970년 12월 13일 자로 홍동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이 났다. 아버지 이기성이 발령받은 지 24년 만의 일이었다. 이병학은 '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을 펼치는 것이 아버지를 위로하는 것이고, 어머니께 효도하는 길'이라고 결심했다.

예산교육장이 되다

학업에 대한 이병학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1974년에 숭전대학 영문과(야간)에 입학했다. 학교가 파하고 대전의 숭전대학교까지 가는 데 1시간 30분이 걸렸다. 저녁 먹을 시간도 없었다. 그 와중에 중등교원 자격시험에 합격해 홍성고등학교에 이어 광천상고에서 교사를 했다.

1990년에는 그에게 도전의 길이 열렸다. 평교사 출신 장학사 공채시험을 보게 된 것이다. 당시까지는 교감만이 장학사 시험을 볼 수 있었는데, 충남도교육청이 전국에서 처음으로 평교사도 시험을 보게 한 것이다. 10명을 뽑는데 이병학이 15: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이후 그는 충남 온양의 충무교육원과 홍성교육청 장학사를 역임했다. 이후에 교감 자격증도 취득, 광천상고 교감과 홍성여중 교장을 지냈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는 예산교육장을 지냈다.

2011년 갈산고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이병학은 41년 교직을 떠나 정년퇴직했다. 첫 교사 발형 때 그가 한 결심, '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을 펼치는 것이 아버지를 위로하는 것이고, 어머니께 효도하는 길'이라는 다짐을 실현했다.

중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그가 풀무학교를 거쳐 검정고시, 공주교대, 숭전대, 장학사시험 등의 과정을 거쳐 예산교육장이 되기까지는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머니 이명화, 큰아버지 이기혁, 풀무학교 공동설립자 주옥로, 대전고등학교 이종호 교장이 그들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그는 40여 년의 교직생활을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아버지 이기성의 꿈은 좌절되었지만, 아들 이병학이 아버지의 꿈을 이룬 것이다. 또한 이병학은 교육자 집안의 일가를 이루었다. 그의 아내 김순환은 홍성군 장곡초 교장으로 정년퇴직을 했으며, 아들과 딸은 경기도에서 현직 교사로 재직중이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1년 6월 07일, 월 9:18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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