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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경제
 
"하버드대 나왔잖아요" 당 대표 선거 결과가 학벌순?
[아이들은 나의 스승] 10대 아이들의 세상 사는 문법... 공고한 학벌 의식 두렵다


▲ 국민의힘 당 대표에 도전한 나경원(오른쪽부터), 주호영, 조경태, 이준석, 홍문표 후보가 9일 서울 여의도 KBS에서 열린 TV토론회에서 토론시작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서울=오마이뉴스) 서부원 기자 = 이준석을 주제로 두 시간 동안 아이들과 대화를 나눴다. 놀랍게도 이준석을 모르는 아이는 거의 없었다. 그가 서른여섯의 젊은 나이로 국민의힘 신임 당 대표에 당선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하려던 참이었는데, 아이들은 서로 쳐다보며 그가 정치인이었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에게 이준석은 정치인이 아니라 유명 방송인이었다.

토론의 달인, 과학고 출신, 하버드대 졸업생, 공부의 신… 아이들이 말하는 이준석의 수식어다. 이는 모두 TV의 예능이나 시사 토론 프로그램과 여러 유튜브 채널에 출연하면서 얻게 된 이미지다. 정작 그가 국회의원 선거에 세 번이나 출마한 정치인이라는 사실은 생소해했다.

"이준석이라고 쓰고, '엄친아'라고 읽죠."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는 한 아이의 말이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스펙의 소유자라며 자신의 '롤모델'이라고 했다. 집안 좋지, 학벌 좋지, 잘 생겼지, 말 잘하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그를 통해 새삼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며 웃어 보이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이준석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단 하루만이라도 이준석처럼 살아봤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고 말하는 아이도 있었다. 모든 걸 다 가진 그가 총선에서 세 번이나 연거푸 낙선했다는 사실을 못 믿겠다면서, 그를 떨어뜨린 상대 후보의 스펙이 궁금하다고 말했다.

'한국 정치의 지각 변동'이라는 기사 제목을 보고서도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 일색이었다. 젊은 나이에만 주목하니 그렇지, 경쟁 후보 중에 그만한 스펙을 가진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다. 당선될 만한 사람이 당선된 것뿐인데, 기자들이 호들갑 떨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실력은 스펙과 동의어

아이들은 정치든 뭐든 '나이보다 실력'이라고 말했다. 그가 20~30대 청년들로부터 압도적 지지를 받는 건 당연하다고 입을 모았다. 봉건적인 신분 사회도 아니고, 나이 많다고 대우를 바라는 건 '꼰대 짓'이라고 말했다. 그가 이미 실력이 검증된 사람이라는 데엔 이견이 없었다.

"그는 하버드대를 나왔잖아요.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하죠?"

그의 실력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한 아이가 말을 자르며 이렇게 답했다. 사실 그는 정치인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낙선했으니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없었다. 방송에 나가 자신의 생각을 두루뭉수리 피력했을 뿐이다.

아이들에게 실력은 스펙과 동의어다. 본디 영어 단어 '스펙(specification)'은 기준이나 규격, 사양 등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지만, 그들은 오로지 실력을 검증할 수 있는 계량화된 지표로 번역한다. 학벌이나 자격증, 하다못해 토플과 토익 점수도 실력을 증명하는 도구로 활용된다.

스펙이 변변치 않은 자는 '고(高)스펙'을 갖춘 자를 '리스펙(Respect)'해야 한다. 만약 그를 시샘하거나 남들 앞에서 험담하면 주위로부터 대번 지질한 자로 낙인찍힌다. 아니꼬우면 열심히 노력해서 레벨을 높이면 된다고 조언한다. 이것이 요즘 아이들의 세상 사는 문법이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엄친아'는 시샘이나 조롱에 가까운 표현이었는데, 요즘엔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부모 잘 만나는 것도 능력"이라는 식의 망언까지 용납하는 건 아니지만, 부모를 잘 만났다고 해서 모두 성공하는 건 아니잖으냐는 식이다. '엄친아'에 대한 편견이 다소 누그러진 것이다.

선거 결과를 출신 대학으로 해석하다

아이들은 이준석을 그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 과학고에 진학하고 세계 최고의 대학이라는 하버드대까지 합격했으니 그 노력을 인정하고 보상해주는 건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많지만, 그만한 학업적 성취를 거둔 이는 드물지 않느냐며 두둔했다.

압권은 그의 당선은 당연하고도 공정한 결과라는 한 아이의 주장이었다. 스펙을 기준으로 이번 선거 결과를 분석해봤다는데, 듣고 있던 아이들은 억지스럽다고 키득거리면서도 일리가 있다며 수긍하는 눈치였다. 후보자별 득표율 순위와 그들의 학벌 서열이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후보자별 출신 대학을 보면, 1등은 하버드대, 2등은 서울대, 3등은 영남대, 4등은 부산대, 5등은 건국대 순이다. 하위 3명의 득표율을 모두 합해도 2등에 미치지 못한다며, 서울대의 위상을 보여주는 결과라고 해석했다. 서울과 지방의 차이보다, 서울대와 비(非)서울대의 격차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인-서울' 대학이 지방대에 밀린 이유를 설명하는 것도 눈길을 끌었다. 법대와 농대, 공대 등 전공 학과의 차이라는 건데, 지금의 수능 합격선과 대체로 일치한다고 덧붙였다. 후보자의 인지도 차이는 애초 논외였다. 학벌에 따른 차별을 합리적이고 공정하다고 여기는 아이들 앞에서 반박할 말이 혀끝에서만 맴돌았다.

한편, 다른 모든 대학을 무릎 꿇린 서울대라도 하버드대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한단다. 아이들은 학벌 구조를 골품제에 비유했다. 하버드대 출신이 성골이라면 서울대는 6두품 정도에 불과하다며,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속담까지 끌어와 설명했다.

서울대는 죽기 살기로 노력하면 바라볼 수라도 있지만, 하버드대는 '넘사벽'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렇듯 하버드대가 서울대 위에, 서울대는 나머지 대학들 위에 군림하는 건 아이들에겐 공정한 질서다. 아이들이 이른바 'SKY' 출신이 고위 공직과 기업의 임원을 독식하는 현실에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 이유다.

겁이 났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던 4년 전 대통령의 취임사를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애초 기회가 평등하지 않으면 과정이 공정할 수도, 결과가 정의로울 수도 없건만, 그들은 그 '인과 관계'에는 관심이 없다. 결과만 좋으면 다 좋다고 여길 뿐이다.

아이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알게 된다. 그들은 기회의 평등까진 바라지도 않는다는 것을. 부모를 선택해 태어날 수도 없는데 무슨 기회의 평등이냐며 눈을 흘긴다. 그저 과정만이라도 공정하길 바란다. 그들이 학생부종합전형을 불신하고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지지하는 가장 큰 이유다.

도리어 정의로운 결과인가를 따지기보다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걸 정의롭지 않다고 여긴다. 각자 출발선이 다른데도 사람들의 시선이 오로지 결승선에만 쏠려있어서다. 이준석을 향한 시선 역시 당선과 하버드대에 꽂혀있을 뿐, 유복한 가정환경과 그의 부친이 서울대 출신이라는 점은 쉽게 무시된다.

수업 때마다 머지않아 학벌이 아무런 효용이 없는 시대가 온다고 강조해왔는데, 아이들의 공고한 학벌 의식을 확인하고 나니 뒷맛이 개운찮다. 지금껏 쇠귀에 경 읽기였나 싶어서다. 내 말에 수긍하기는커녕 현실을 외면하는 철부지 이상주의자로 보는 냉찬 시선마저 느껴진다.

아이들은 하버드대 출신의 유명 방송인 이준석을 선망했다. 그의 스펙을 칭송하며 실력에 따른 차별이 공정하다는 그의 주장에 찬성했다. 그들은 헌정사상 최연소 야당 대표로 당선된 그에게 열광적 지지를 보낼 준비가 돼 있다. 이번 선거는 어쩌면 전초전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요컨대, 평등과 공정, 정의에 대한 10대 후반 아이들의 인식은 50대인 나와 천양지차였다. 세대 차이로 눙칠 수 없는 차이였다. 그들이 이준석을 선망하고 지지한다는 건, 그가 그토록 강조하는 실력에 따른 차별을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뜻이다. 그들의 반응에 덜컥 겁이 났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1년 6월 15일, 화 4:27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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