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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고/에세이] 기고
 
장관 발령식장에서 저격준비 했으나
[김재규 평전 제13회] 건설부장관으로 입각, 중동붐에 기여


▲ 박정희(중앙)와 김재규(오른쪽), 그리고 차지철(왼족) ⓒ 박도

(서울=오마이뉴스) 김삼울 기자(전 대한매일신보 주필) = 김재규는 1974년 9월 17일 건설부장관으로 입각하였다.

중정 차장에서 9개월만이다. 그가 중정 신직수 부장 체제에서 벗어난 것은 그나마 행운이었다.

"신직수는 1976년 10월, 로비스트 박동선이 미국 의회에 거액의 로비자금을 제공한 사실이 보도됨으로써 시작된 한ㆍ미간의 외교 마찰을 빚은 코리아게이트사건이 발생하고, 중앙정보부 요원 김상근이 미국에 망명한 것을 계기로 그해 12월 3일 경질되었다." (주석 8)

박정희가 그를 건설부장관에 임명한 데는 비화가 전한다.

박정희 씨가 5사단장을 할 때, 김재규 씨는 5사단 참모장을 했는데, 박 사단장은 어느 겨울날 김 참모장에게 하사관학교를 지으라고 명령했다. 김재규 참모장은 날씨가 추워서 흙을 바를 수가 없어 고민하다가 박 사단장에게 황소 한 마리를 보상금으로 달라고 했다. 김재규 참모장은 황소 한 마리로 회식을 베풀어 부하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미제 식기에 숯불을 넣어 이긴 흙이 얼지 않게 해서 다림질하여 흙집을 지었다. 김재규장군의 호위병을 지냈던 이종도 씨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 장군이 5사단 하사관학교를 기발한 아이디어로 지은 사실을 기억해서 그를 건설부장관에 임명했다는 것이다. (주석 9)

그가 입각할 즈음 정치상황은 살얼음판이었다. 1974년 1월 8일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와 개헌논의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1호에 이어, 민간인들을 군사법정에서 재판하는 비상군법회 설치를 내용으로 하는 제2호 선포, 4월 3일에는 민청학련사건 발표와 함께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였다. 하나같이 초헌법적인 권력행사이고 민주인사들을 탄압하고자 조작된 사건이었다.

이와 같은 긴박한 상황에서 8ㆍ15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박대통령 부인 육영수가 재일교포출신 문세광에 의해 저격 피살되고, 8월 23일에는 사쿠라 논쟁을 빚었던 이철승 대신 김영삼이 선명노선을 내걸고 신민당 총재로 당선됨으로써 정가는 더욱 긴장되고 있었다.

경제사정도 어려웠다. 1973년의 오일쇼크로 오일이 배럴당 3달러에서 12달러로 치솟았다. 오일쇼크는 석유 소비를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중화학공업화 드라이브를 추진하는 도중이어서 타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왜 건설부장관에 기용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2년 3개월 동안의 재임중 중동(中東) 건설수출을 적극 추진, 상당한 실적을 올린다.

74년 6천 9백만 달러의 중동건설은 그의 재임중인 75년 8억 5천만달러로 격증했다. 중동과 전혀 관련이 없었던 그가 중동시장개척의 선구자가 된 것은 특기할만한 일이다.

어쨌건 당시의 경제난국은 중동건설 진출로 고비를 넘기면서 호황으로 돌아섰는데 그는 장관취임 직후에 "나는 경제도 모르고 오직 총만지는 것만 알고 있다. 우리 경제가 앓고 있는 병의 진원지는 중동이다. 처방도 중동에서 찾아야 한다. 그 곳의 오일달러를 들여올 궁리를 하자"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중동에 착안한 것은 당시 건설업자로 중동에 자주 드나들었던 동생 황규(恒圭) 씨의 권유가 단초를 열었다고 한다. (주석 10)

김재규의 건설부장관 재임 중 중동건설붐이 일어나고 많은 외화와 일자리가 창출되었으며, 중동특수를 타고 현대건설 등이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현대건설의 경우 1975년 10월 바레인 아랍수리조선소 건설공사 수주를 시작으로 12월 사우디 해군기지 해상공사를 따냈고, 1976년에는 당시로서는 사상 최대의 건설프로젝트였던 주베일신산업공사를 8억 3000만 달러에 수주하는 개가를 올렸다. 건설장관으로서 큰 업적에 속한다.

결행 준비했다 단념... 장준하 "민주회복엔 군대 밖에 없다"

건설부장관의 업적과는 상관없이, 그는 장관 발령식장에서 박정희를 쏘고 자신도 자결하여 유신독재체제를 무너뜨리려 했다고 한다.

앞에서 소개한대로 긴급조치 선포, 민청학련사건 등 민주주의 기본가치와 헌정질서가 크게 훼손되고 있던 시점이다. 변호인단의 「항소이유서」중 관련 부분이다.

3군단장에서 유정회 국회의원을 거쳐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옮긴 뒤에도 역시 유신헌법은 안 되겠다는 마음이 점점 굳어져 독재체제를 내 목숨하나 바쳐 바꾸어 버릴까 하는 생각을 갖기 시작하다가 마침 1974. 9. 건설부장관으로 발령받고 발령장을 받으러 가는 때 박 대통령을 쏘고 피고인도 자결하여 독재체제를 무너뜨리려는 결의를 갖고,

국민과 어머니, 집사람, 딸 및 남동생들에게 전할 유서 다섯 통을 준비하여 자택 피고인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두고 조그마한 태극기의 네 면에 민주, 인권, 자유, 평등이라 쓴 것을 피고인의 포켓 속에 넣고 사령장을 받으러 들어갔으나 결행하지 못하고 위 유서와 태극기는 그대로 갖고 있다가,

대통령의 1975년 초도 순시 때에 똑같은 생각으로 건설부장관실에 있는 태극기의 축 늘어진 귀퉁이를 면도칼로 잘라서 그 속에 권총을 넣어 두었다가 순시하는 대통령을 피고인의 목숨과 함께 끊겠다고 결의했으나 막상 대통령과 만난 뒤 대화해보면 모진 마음이 약해져서 그 생각을 버리고 위에 말한 유서들과 태극기를 태워 버렸다는 것입니다. (주석 11)

변호인단의 이와 같은 「항소이유서」는 변호인들이 옥중에서 김재규와 접견한 내용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객관적인 입증자료는 없을까.

이해학 목사는 긴급조치 1호 위반혐의로 15년 징역을 선고받고 안양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우연찮게 전 『사상계』 사장 장준하와 같은 방이었다.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이 된 장준하는 광복 후 백범 김구의 비서를 거쳐 월간 『사상계』를 발행하다가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잡지를 넘기고 정계에 입문,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옥중 당선되었다. 그리고 줄곧 일본군 출신 박정희는 결코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라며 비판하고, 유신헌법 반대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가 구속된 것이다. 그렇다면 김재규와 장준하는 어떤 사이였을까.

김재규 씨와는 어떤 관계인가를 물었다. 사모님(장준하 부인 - 필자) 말씀으로는 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장 선생이 옥중 당선이 되어 국방위원으로 활약을 하셨을 때부터라고 하셨다. 국정감사를 나가면 거의가 돈과 향응으로 처리했기에 오히려 부정을 합리화 해 주는 정치권의 모습에, 의기가 넘친 김재규 장군이 정치권에 대한 실망만이 아니라 군에 대한 절망감에 싸여있을 때에 장준하 의원을 만난 것 같다.

장 의원은 일체의 향응을 거절하고 내무반에 직접 들어가서 사병들과 같이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며 제도개선에 앞장서셨다. 김재규 씨가 희망의 눈을 떴다.

"아, 한국 정치인 중에도 썩지 않는 사람이 있구나. 그렇다면 우리도 희망이 있는 것 아니냐." 하고 그때부터 군 쇄신에 앞장설 뿐 아니라 장준하 선생이 근처에 오신다는 연락이 있으면 길을 막고 기다렸다가 대접하고 동료들과 정치이야기를 즐기는 사이였다.
(주석 12)


▲ 광복군 출신으로 『사상계』를 창간한 장준하 ⓒ 장준하기념사업회

김재규는 장준하를 만나 어떤 '언질'을 주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가 건설부장관으로 입각한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상심했다는 것이다. 다시 이해학 목사의 증언.

우리는 밤을 세우며 대화를 나누었다. 이 엄혹한 군사정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주제였다. 우리가 "시민운동이나 4ㆍ19 같은 혁명만이 길"이라고 한 데 비해서 장준하 선생은 "군밖에 없다"라고 단언하셨다.

우리가 제3세계의 군사쿠데타의 악순환을 예로 들면서 군은 새로운 악이라고 우려한 데 비해서 장 선생은 이 정부의 속성을 몰라서 그렇게밖에 생각 못하는 우리들의 감상주의를 개탄하셨다. 그리고 "군부를 청산하고 민정이양을 확실하게 할 애국군인밖에 없다"라고 단언하셨다. 나는 민주주의자인 장 선생께 대한 실망까지 하였다.

'어떻게 군을 다시 민주화의 도구로 쓸 수가 있을까?' 그러나 그분은 "정의의 편에 협력할 군인도 있다"고 하셨다.

교도소 측에서는 감옥이 정치교육장이 된 것을 눈치챘는지 우리는 전방되어 다른 방으로 가서 동료들과 합방이 되었고 장 선생은 독방을 쓰게 되었다. 그 때 장 선생의 심장병이 돋아서 병동으로 옮겨 가 버렸다.
(주석 13)

장준하는 김재규를 '정의의 편에 협력할 군인'으로 인식하였던 것 같고, 이 같은 믿음에는 김재규의 어떤 '언질'에서 근원했을 것이다.

주석
8> 앞과 같음.
9> 오성현, 앞의 책, 101쪽.
10> 김대곤, 앞의 책, 128쪽.
11> 안동일, 앞의 책, 458쪽.
12> 이해학,「장준하 선생과 김재균 장군에 대한 나의 확신」,『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 23~24쪽, 10ㆍ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 추진위원회, 2001.
13> 앞의 책, 21쪽.
 
 

올려짐: 2021년 6월 21일, 월 7:1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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