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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고/에세이] 기고
 
제8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
[김재규장군 평전: 제14회] 그가 중정부장에 임명될 당시 국내외 정세

(서울=오마이뉴스) 김삼웅 기자(전 대한매일신보 주필) = 김재규는 1976년 12월 4일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하였다.

만 51세, 건설부장관에서 곧바로 직행이었다. 김종필→김재춘→김형욱→이후락→신직수로 이어지는, 중정의 제8대 부장이다.

중정은 1972년 12월 서울 이문동의 청사에서 새로 남산 청사를 준공하여 이때부터 세칭 '남산'으로 불리는, 민주인사들에게는 고문과 악몽의 소굴이었다.

그의 취임을 전후한 내외 정세를 살펴보자.

박대통령의 잇따른 긴급조치 선포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반유신 항쟁이 계속되자, 정부는 1975년 2월 12일 유신체제 찬반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73%의 찬성률을 얻어냈다. 반대운동이 허용되지 않는 일방적인 국민투표의 결과였다. 이를 신뢰하는 국민은 많지 않았다.

박정희는 이를 계기삼아 4월 8일 긴급조치 7호를 선포하고, 다음날 이른바 인민혁명당 재건위사건 관련자 8명을 사형집행하였다. 이들은 뒷날 재심에서 모두 무죄판결되었다. 5월 13일에는 유신헌법에 대한 비방ㆍ반대ㆍ개정 주장 및 긴급조치 9호에 대한 비방을 금지하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래 가장 반헌법적이고 포악한 조치였다.


▲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 자료사진

7월 16일에는 또 시국사범의 사회복귀를 봉쇄할 목적으로 사회안전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유신정권의 이같은 폭압에도 학생들과 민주세력은 기죽지 않았다. 1976년 3월 1일을 기해 윤보선ㆍ김대중ㆍ함석헌ㆍ이해동ㆍ함세웅 등 민주인사들이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자, 정부는 관련자 11명을 정부전복선동 혐의로 구속 또는 입건하였다.

김재규가 취임하고 20여일이 지난 후 미국의 유력지 『워싱턴 포스트』에서 박동선이 한국정부의 기관요원으로 미국의 상하의원과 고위공직자들을 매수했다고 보도, 이른바 코리아게이트사건으로 인한 미의회의 청문회가 열리고,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망명 등 굵직한 사건들이 터져나왔다.


▲ 이종찬(1916~1983) 장군은 우리 역사에서 군의 "정치적 중립" 원칙을 정립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 위키피디아 퍼블릭도메인

중앙정보부는 10ㆍ26사건 후 국가안전기획부로 개칭되고, 1999년 김대중 정부에서 다시 국가정보원으로 바뀌었다. 제22대 원장으로 국가정보원 개혁작업에 나섰던 이종찬(허정 내각의 국방장관과 동명이인) 씨가 지켜보았던 김재규의 모습이다.

1976년 6월 내가 영국에서 돌아왔을 때는 신직수 부장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해 12월 김재규 부장이 부임했고, 그때부터 10ㆍ26사건이 벌어진 1979년 말까지 근 3년 동안 나는 중앙정보부 본부에 근무하면서 김 부장으로부터 많은 신임을 받았다. 동기들 가운데 과장에서 부국장으로 가장 먼저 승진했고, 김 부장으로부터 특별 임무를 부여받기도 했다. 심지어 이철희 차장이 내 소관 사항을 부장에게 보고할 일이 있을 때에는 나를 데려와 직접 보고하라고 시키기도 했다.

나는 속으로 '김 부장이 이종찬장군(동명이인)을 존경하는 바람에 내가 그 덕을 보나' 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내가 직접 부장으로 모신 김재규는 기본적으로 선량한 사람이었다. 정의감도 있고, 인정도 많았다. 게다가 그는 효자였고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남다른 자존심이 있었다. 그 자존심이 훼손되면 참지 못하고 욱하는 기질이 발동되곤 했다. 주위에서는 그것을 일제시대에 소년항공병으로 가서 얻은 '사무라이 기질'이라고 보기도 했다. 문제는 군을 포함해 그의 공직 경력에서 그렇게 자존심 상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았다는 점이다. 인간적으로 안타까울 정도였다. (주석 1)

김재규는 평소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공직생활이 계속되면서 마시는 기회가 더러 있었다. 과로때문인지, 6사단장 이후 나빠진 간(肝)이 근래에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중앙정보부장이 되어서 업무는 과중되고 휴식 시간은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해서 김재규 부장의 건강상태는 간경화증으로 위험 수준에 육박하고 있었다. 간 전문 주치의 서울대 병원 김정용 박사의 정규 검진 외에도 김재규 부장의 6촌 여동생 김차분 씨가 공관으로 와서 관장(약을 항문에 주입하여 대변을 보게 해서 독소가 빠지게 함)을 시키곤 했으나, 술을 먹은 날은 팔 위에 반점이 생기는 등 간경화증의 상태는 날로 나빠만 갔다. 김차분 씨는 김재규 부장 시절 3년을 매주 2~3회씩 정기적으로 공관에 드나들며, 김부장에게 관장을 시키고 김부장을 소파에 쉬게 하여 반점이 사라지도록 했다. (주석 2)

'대의멸친'의 정신 새기며

중앙정보부장은 국가의 모든 정보를 취합하는 자리다. 여기에는 대통령까지 포함된다. 그동안 멀리에서 혹은 지근에서 박정희를 지켜보았고 알 만큼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중정부장의 위치에서 보니 문제가 훨씬 심각했다. 육영수 여사 사망 후에 보인 사생활은 추악하기 그지없었다.

김재규가 변호인단이 항소이유서에서 적시한 대로 3군단사령부에 연금, 혹은 건설부장관 임명식장에서 저격 기도를 할 만큼 '박정희 제거'가 움직일 수 없는 목표였다면, 그 동기는 어디서부터 싹이 텄을까.

앞에서 '박정희는 속도, 김재규는 방향'이란 표현을 썼는데, 동향이고 동기생인 박정희가 추구하는 '권력자의 길'에서 그 자신 많은 은혜를 입으면서도, 마음 한 켠에서는 정녕 그 방향이 정도가 아니라는 '양심의 소리'가 자리잡게 되었을 것이다.

어릴 때 아버지의 "바르게 살라"는 가르침, 피난수도 부산에서 쿠데타를 꼬득였으나 군인이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이종찬 장군의 교훈, 그리고 민족주의자 장준하와의 만남이 '속도보다는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고 할까.

김재규가 중앙정보부 차장에 부임될 때 부인을 비롯 가족ㆍ친지들의 반대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날 역술인을 찾아갔다. 당시는 정부의 주요 청사기공식에서 고사를 지내고, 주요 행사의 택일을 할 때에는 역술인을 찾았다. 대통령후보들 중에 출마에 앞서 조상묘를 옮기거나 역술인들이나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는 일이 잦을 때이다.

그는 역술인 오 모 씨를 찾았고, 그의 집에서 점괘보다 액자에 쓰인 〈비리법권천(非理法權天)〉이란 문구를 보고 크게 감동했다.

"법은 이치에 이기고, 권세는 법에 이기고, 마지막으로 하늘은 권세에 이긴다"는 뜻이 담긴, 이 문구를 보고 그는 큰 깨달음을 갖게 되었다.

그가 중정부장에 취임했을 때 군의 선배인 이형석(예비역 육군소장)씨가 〈대의멸친(大義滅親)〉이란 휘호 한폭을 써보내었다.

"대의를 위해 사사로움을 배척하라"는 뜻이었다. 집무실에 걸어놓았다. 틈나는대로 〈대의멸친〉과 〈비리법권천〉을 휘호로 쓰면서 실천의지로 다졌다.

10ㆍ26 후 재판과정에서 자신의 행위를 '민주화 의거'의 입증자료로 변호인단이 제출하기도 하였다. 박정희 체제는 이치와 법률에 앞서 긴급조치, 민주공화의 기본가치보다 3권귀일의 유신헌법을 앞세우는 구조에서, 국민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늘(역사)의 심판을 믿는다는 역사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 대의를 위해 권총을 뽑았던 것 같다.

김재규가 떠안은 유신말기의 국정은 어느것 하나 녹록한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대미관계가 심각한 수준이었다. 먼저 중정 출신 인사들과 외교관들의 망명 사건부터 살펴본다.

김형욱은 6년 동안 지켜온 중앙정보부장직에서 밀려나자 박정희에게 보복하고자 하는 앙심에서 미국 망명을 택했다. 3선개헌과 이른바 동베를린 간첩단사건 등 각종 악역을 맡아 박정희에 대한 최고의 충성을 다했는데도 불구하고 해임이 예상되자 이에 앙심을 품고 미국 망명을 치밀하게 계획하여 이를 실천에 옮겼다.

김형욱은 정보부장으로 있으면서 언젠가 해임에 대비하여 미국 뉴저지주에 당시 시가로 27만 달러짜리 고급 저택을 마련하고 부인과 두 아들과 딸을 먼저 미국으로 보내놓고 있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회를 노리던 김형욱은 1973년 4월 15일 대만의 학술원으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슬그머니 김포공항을 빠져나가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공화당의 전국구의원 5번으로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박정희가 언제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목을 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었다. 누구보다 박정희 권력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형욱이 얼마나 많은 돈을 해외로 빼돌렸는지는 여전히 비밀에 속한다. 그러나 미하원 프레이저위원회가 나중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의 재산규모는 1천 5백만 달러 내지 2천만 달러에 이른 것으로 밝혀졌다.

뉴욕은행에 450만 달러가 정기예금되어 있었고 스위스은행에도 정보부장 재직시에 거액을 맡겨두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에 도착한 김형욱은 초기 2년여 동안은 외부와 담을 쌓고 지냈다. 그가 즐긴 소일거리는 라스베이거스나 파리의 카지노 출입과 골프, 그리고 가족끼리의 세계여행이 전부였다.


▲ MBC PD수첩은 지난 5월 3일 "김형욱 양계장 암살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며 이를 처음 제기한 4월 11일자 시사저널 보도와 상반된 주장을 펼쳤다. 생전 김형욱 모습. ⓒ MBC 제공

그러던 김형욱이 1976년 초부터는 칩거생활을 끝내고 미국하원 외교위원회 국제관계 소위원회에 박 정권의 비리, 즉 박동선사건의 내막을 알리는가 하면, 미의회의 청문회에 나서고 미국과 일본의 유력한 매스컴과 회견하는 등 적극적인 반박정희 활동을 벌였다.

김형욱은 1979년 10월 초, 파리에서 의문의 실종사건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의 실종사건은 지금까지 하나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는데, 한국 정보부 요원에 의한 현지암살 또는 강제납치살해 등의 의문이 따르고 있다.

김형욱의 망명을 전후하여 주미 한국대사관의 참사관 김상근 씨가 미국에 망명한 것은 1976년 11월 24일이다. 5ㆍ16 직후인 61년 7월 중앙정보부에 들어가 김형욱 부장의 비서관으로 일한 적도 있는 김씨는 70년 일등서기관의 직함을 갖고 주미대사관에 근무발령을 받은 다음 76년 참사관으로 승진했다.

김씨가 미국에서 맡은 임무는 교민들의 반정부적 활동을 봉쇄하고 유신지지로 유도하는 일이었다. 그는 특히 75년 8월부터 한국 정부로부터 '백설작전'이란 비밀임무를 부여받는다. 이 작전은 미국 내 영향력 있는 언론인이나 학자들을 포섭하여 박정희 지지로 여론을 유도하는 임무였다. 그러나 유신체제의 인권탄압과 부패문제 등으로 미국의 여론이 극도로 좋지 않을 때였기 때문에 김씨의 임무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 한국 정부는 그를 소환하기에 이르렀다.

본국 정부의 소환명령을 받은 그는 정치적 보복이 두려워 미국 FBI에 망명을 신청하게 되었고, FBI로부터 보호와 생활비를 받으면서 77년 10월에는 미하원 윤리위원회에 나타나 '백설작전'의 진상을 폭로하고 박 정권의 치부를 들추어내는 등 반정부활동을 계속했다.

뉴욕총영사관 손호영 참사가 미국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한 것은 77년 9월 16일이다. 손씨의 공식직함은 뉴욕 총영사관 참사관이지만 실제 신분은 뉴욕지구 KCIA 책임자였다. 그는 한국 정부로부터 김형욱을 귀국시키거나 최소한 미의회 증언을 막도록 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김형욱의 반정부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고 손씨는 귀국명령을 받았다. 귀국 후의 엄중한 문책을 두려워한 그는 FBI 요원들에게 망명신청을 하게 되었고, 망명선물로 「1976년 대미공작 계획서」라는 한국정부의 비밀 대미 로비활동 계획서를 프레이저위원회에 넘겨주었다.

주미공보관장 이재현 씨가 미국에 망명신청을 한 것은 73년 6월이다. 70년부터 주미공보관장직을 맡고 있던 이씨는 재직중에 유신을 맞아 한국 정부로부터 유신체제를 적극 홍보하라는 훈령을 받았다. 이 훈령은 독재체제인 유신의 지지를 위해 일반 외교관의 활동영역을 넘어서는 각종 불법공작을 벌이라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가뜩이나 미국사회에서 인기 없는 유신체제를 홍보하고 여기에다 불법공작 임무까지 부여받은 이씨는 한국 정부의 공작지시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따라 그의 행동은 감시를 받았고, 언제 소환될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되어 결국 망명을 택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에 정치망명을 택한 이씨는 일리노이 대학에서 준교수로 재직하면서 비교적 조용히 지내다가 77년 10월 미하원 윤리위원회 청문회에 나가 의회의원 매수공작 등 불법 로비활동 사실을 증언하는 등 반정부 활동에 나섰다.

70년대 중반 미주 지역의 한국공관은 잇따른 공관원 망명사건으로 긴장되고 있었다. 이재현ㆍ김상근ㆍ손호영과 더불어 73년 5월 주미 공보관 직원 한혁훈 씨가 한국의 유신 쿠데타에 반대의사를 밝히고 사표를 제출, 미국에 영주권을 신청하였다.

또 73년부터 75년까지 주미공보관에 근무한 김성한 씨는 한국 정부의 마닐라 전근발령에 반발, 가족과 함께 미국에 영주권을 신청했다. 김씨는 사직 후 반정부 활동을 벌였다.

뉴욕대표부 지역책임자 이영인 씨는 77년 귀국 명령을 받고 미국에 영주권을 신청한 바 있고, 캐나다 주재 한국대사관 양영만 영사는 78년 한국 정부로부터 캐나다 지역의 반정부적 교민활동에 강경하게 대응하라는 훈령을 받고 이를 거부, 망명을 선택했다.

주석
1> 이종찬, 앞의 책, 307~308쪽.
2> 오성현, 앞의 책, 108쪽.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1년 7월 05일, 월 5:17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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