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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경제
 
'발광한 사람처럼 키들키들 웃기만'... 한국 언론의 광기
[기획 - 바로잡습니다] 이수근 사건

(서울=오마이뉴스) 변상철 기자 = "피고인(이수근)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권리와 방어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국가에 의해 위장간첩으로 낙인 찍혀 생명권을 박탈당했다."

2018년 10월 11일 서울중앙지법 재심 법정은 '이수근'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바꿔말하면 이수근은 전날까지 간첩이었다는 말이다. 자유를 찾아 북한에서 한국으로 탈출했던 이수근은 어떻게 간첩이 되었고 또 간첩 혐의를 벗었을까?

1967년 3월 23일 판문점에서 북한중앙통신 부사장이었던 이수근이 탈출했다. 북한 고위직의 탈출 소식에 한국 사회는 일순간 환영 일색의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정치권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대대적인 환영대회가 열렸고, 이수근의 반생기(半生記) 영화(고발)가 제작되기도 하는 등 이수근은 그야말로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 1967. 3. 23. 경향신문. 이수근의 판문점 탈출 기사가 사진과 함께 크게 실렸다. ⓒ 경향신문


▲ 1967. 3. 23 조선일보 1면. 판문점에서 탈출해 한국사회로 귀순한 이수근의 탈출 소식을 1면 머리기사로 전했다. ⓒ 조선일보

이수근은 새 배우자와 결혼하고 수많은 반공 강연을 하며 한국 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수근에 대한 한국 사회의 따뜻한 관심은 채 2년도 지나지 않아 정반대의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는 평소 중앙정보부의 일상적 감시와 이념 선전에 동원되는 한국사회 생활에 염증을 느껴 제3국으로 탈출을 감행했다.

그러나 그의 탈출은 홍콩에서 덜미를 잡혔다. 그가 압송되면서 한국 사회의 분위기는 급반전했다. 급반전 분위기를 주도한 것은 언론이었다. 언론은 이수근을 '자유를 찾아 목숨 걸고 북한을 탈출' 했던 영웅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고 이중 간첩으로 내려온 북한 괴뢰의 악마'로 표현했다.


▲ 1969. 2. 13 경향신문 1면. "이수근은 간첩이었다"라는 제목의 1면 기사. 이수근의 압송 순간과 변장 모습 등의 사진을 게시했다. ⓒ 경향신문


▲ 1969. 2. 13 경향신문 3면 "음흉한 수법...북괴 스파이". 기사 내용에 따르면 이미 이수근은 북한의 지령을 받아 암약한 간첩으로 단정됐다. ⓒ 경향신문

각종 신문들은 이수근이 체포·압송되어 공항에 내리는 순간부터 중앙정보부의 발표 등을 인용해 '김일성 지령을 받고 위장귀순'한 간첩이라는 보도를 앞다투어 보도했다. 체포된 때로부터 몇 개월간 신문은 이수근을 간첩뿐만 아니라 파렴치한 인간으로 묘사했다.

'음흉한 수법... 북괴 스파이'
'발광한 사람처럼 키들키들 웃기만'
'내려올 때부터 수군수군했어'
- 1969. 2. 13. 경향신문 3면


▲ 1969. 2. 14 경향신문. "저주받을 이수근"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눈에 띈다. ⓒ 경향신문

신문 기사는 검증되지 않은 사생활 기사를 쏟아내며 이수근을 파렴치한 범죄자로 덧칠했다.

순정의 여심도 갈가리 짓밟은 붉은 간첩 이수근
치사한 여자관계
황해도 서흥군 구보면당의 평당원이 57년에 개성신문 주필로 뛰어오른래 '모스크바', '폴란드' '몽고' 등지에 특파되어 중앙통신 부사장직에 이르기까지 그는 김일성의 주구언론인에 속했다는 사실도 중요시 됐고, 일곱째 탈출 후 서울생활을 통해 공산세계에서는 할 수 없었던 사생활, 예로 대여성관계 등에서 밀 훈련 받은 사람처럼 능숙히 해냈다는 점 등등 수사진은 "이(李)는 간첩이다"...
-1969. 2. 14 경향신문 2면

삼양동에 단층양옥 내부 장식 호화롭게
이수근이 양 1년간 살다 도망친 서울 삼양동 233의 3 단층 양옥집에는 문패도 번지수도 적혀있지 않은 채 13일 상오 '이'와 얼마 전 결혼한 이강월 시의 모친 김봉만 씨(50세)와 40세가량된 식모, 이강월 씨의 친척이라는 30대 청년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이강월 씨는 이날 아침 일찍 집을 나가고 없었다. 대지 70평의 마당에는 탁구대가 놓여있었다. 차고는 텅 비어있었다. 집 내부에는 냉장고 더블베드 등 호화로운 가구가 놓여있었으며 응접실에는 조니 워커 등 빈 양주병 11개, 뒤 창고에는 빈 양주병이 1백여개나 쌓여 있었다.
- 1969. 2. 13 경향신문 3면

이에 더해 이수근의 탈출을 돕다가 체포된 배경옥(전 처의 조카) 역시 범죄 사실 이외에 이전의 개인사에 관한 자극적인 기사가 쏟아졌다.


▲ 1969. 4. 11 조선일보 7면. 이중간첩 혐의로 재판 받는 이수근의 공판정 모습. ⓒ 조선일보



이수근을 도운 배경옥의 정체
월남에 갔다온 여권 위조 상습자...
탈영병에 전과자며 트럭운전사...
- 1969. 2. 15 경향신문 7면

이수근, 배경옥 등에 대한 수사 과정과 재판 과정은 실시간 모니터 되듯 기사화 되었고 법정을 찍은 사진 역시 실렸다.


▲ 1969. 5. 2 동아일보 3면. 이수근 사건 공범 배경옥씨에게 사형이 구형되자 함께 재판받던 여동생이 실신해 쓰러졌다. 이렇듯 재판 과정이 실시간 보도됐다. ⓒ 동아일보

오빠인 배경옥에게 사형이 구형되자 '아이고 오빠!'하고 실신하며 쓰러진 배00 피고...
- 1969. 5. 2 동아일보 3면

다행히도 이수근과 배경옥 등은 지난 2018년 10월 11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김태업 부장판사)로부터 1969년 과거 중앙정보부가 간첩 혐의를 조작한 것이 인정되어 재심에서 반공법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수근이 한국을 탈출하면서 여권을 위조하거나 신고없이 미화를 환전한 혐의만이 유죄로 인정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아 사실상 무죄 선고를 받은 것이다.

이수근과 배경옥 등이 간첩혐의로 조사받고 재판받는 기간 경향·동아·조선·매일경제는 수십 건의 관련 기사를 쏟아냈다. 수사 진행에 대한 보도 기사뿐만 아니라 칼럼과 사설 역시 적지 않게 나왔다.

이런 보도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수근과 더불어 배경옥씨는 은밀한 개인사까지 모두 드러나 일평생 주홍글씨를 안고 살아야 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이들의 억울함이 재심을 통해 밝혀졌지만, 신문사들은 판결 결과에 대한 짧은 보도기사만을 냈을 뿐이다.

이수근 만큼이나 수사기관과 언론기사로 인해 인생이 뒤틀린 피해자가 또 있다. 1972년 9월 춘천 역전파출소장의 딸(당시 9세)을 강간한 뒤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고 정원섭 목사다.

당시 춘천시 우두동에서 만화방을 하던 정원섭씨는 함께 일하던 직원의 허위 증언과 정원섭씨 아들에 대한 수사관들의 기망·위협 등으로 증거가 조작되어 범죄자가 되었다.


▲ 1972. 10. 10 동아일보 7면. 만화가게 직원의 증언으로 정원섭 씨를 체포하게 되었다는 내용 ⓒ 동아일보



만화가게주인 검거
경찰 "경위 딸 살해 자백 받았다"
- 1972. 10. 10 경향신문 7면


▲ 1972. 10. 11 동아알보 7면. 춘천 역전파출소 경위의 딸을 살해한 혐의로 정원섭씨가 체포되었다는 내용 ⓒ 동아일보


▲ 1972. 10. 11 조선일보 7면. 파출소장 딸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정원섭씨. ⓒ 조선일보

영화 <7번방의 선물> 실제 주인공이기도 한 고 정원섭 목사는 15년 옥살이를 한 뒤 출소했지만 그의 삶은 완전히 망가졌다. 정원섭씨는 오랜 시간 강간치사 전과자로 살다가 재심을 통해 2011년 10월 27일 무죄가 선고되어 진실이 규명되었다. 배경옥 역시 21년간의 옥살이를 통해 모든 삶이 망가졌음은 부연하지 않아도 미루어 짐작된다.

이들은 언론에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을까?

고 정원섭 목사는 생전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신학교를 나온 사람이 '강간살인범'이라니, 사실 여부를 떠나 이미 언론에는 그렇게 보도되었다. 그는 한국신학대학의 명예와 기독교인들을 수치스럽게 했다는 것 때문에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수차례 자살시도를 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고 했다(관련기사: "무죄판결문 들고 아들 묘에 갈 겁니다" http://bit.ly/2fyuWb).

배경옥씨는 지난 9월말 기자와 한 전화통화에서 "이수근의 위장 귀순으로 전 국민적 규탄 대상이 되었다. 국민들이 사형시켜라, 화형시켜라 하는데 어떻게 대한민국에 얼굴을 들고 살겠나? 출소해서도 아들이 결국 자살한 것도 내가 대한민국을 배신한 무서운 전과자니까 아들이 어떤 희망을 갖고 살 수 있었겠나?"라며 언론의 보도 행태에 여전히 분노했다. 실제 배경옥씨의 아들은 배씨가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친의 혐의에 비관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재심 과정에서 언론은 똑같은 지면에 똑같은 기사 크기로 보도하지 않았다. 배경옥씨의 경우 "내가 재심을 하는 동안 재심에 관심을 가지고 보도한 언론이 거의 없었다. 내가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아도 '무죄 받았다' 정도의 짧은 글이었다. 나와 이수근이 악마처럼 묘사된 것을 기사를 작성한 언론이 해명 정도는 하고 미안하다고 해야하지 않느냐"며 하소연 했다.

적어도 이수근이나 정원섭씨를 범죄자로 몰고갔던 보도량만큼은 아니더라도 과거 잘못된 보도에 대한 언론사의 명확한 의견을 내놓아야 한다. 당국의 보도자료를 전달한 보도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들을 '붉은' 간첩으로 묘사하고, 각종 칼럼과 논설을 통해 재단했던 것은 분명 잘못된 보도이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사건과 관련없는 사생활 보도로 인한 피해에 대한 책임 역시 적지 않다. 이런 피해에 대해 해당 언론사는 명백하고 이해할 수 있는 해명과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기사를 내놓아야 한다. 언론중재위를 거쳐야 한다는 핑계 뒤에 숨지 말,고 언론사 스스로 위에서 말한 책임있는 보도를 내놓는다면, 그것 자체로 언론사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한다고 인정받을 것이며, 그것이 시민들로 하여금 언론을 신뢰하게 되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1년 11월 16일, 화 5:01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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