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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고/에세이] 생활 에세이
 
하얀 지팡이 들고 미술관 방문... 엄청난 보너스를 받았다
[시력 잃고 알게 된 세상] 소리로 보는 미술관

(서울=오마이뉴스) 김승재 기자 = 10여 년 전, 망막색소변성증이 얼마 남지도 않은 내 시력을 무서운 속도로 갉아먹으면서 내 마음마저 바닥으로 끌고 내려가기 시작했던 때, 우리 부부는 아이들과 경복궁에 들렀다. 역사라면 내가 잘난 체하기 제일 좋아하는 주제였지만, 답답했다. 머릿속에서는 그려지는데 바로 앞에 두고도 눈으로는 제대로 볼 수 없었으니까.

근정전과 경회루를 비롯한 궁궐 건물들은 어떻게 둘러볼 수 있었지만, 국립 민속 박물관에 입장하려니 망설여졌다. 아니 좀 짜증이 났다. 제대로 볼 수도 없는데, 거기다가 실내는 어두워서 돌아다니기도 훨씬 불편할 텐데, 굳이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결국 혼자 밖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아내와 아이들만 들어가라고 했다. 아내도 아이들도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었지만, 난 고집을 꺾지 않았다.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너무 창피하다. 바보, 멍청이, 쪼다. 좀이 쑤셔서 연방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아이들을 앉혀 놓고 역사가 어떻고, 유물, 유적이 어떻고 그렇게 떠들 때는 언제고. 진짜 좀팽이도 그런 좀팽이가 없었다.

지금은 아니다. 여전히 아슬아슬 바보짓을 하려 할 때도 있지만, 다시는 그런 바보 멍청이가 되지 않으려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

올여름, 강릉에 갔다가 궂은 날씨 탓에 시간이 남았다. 그렇다고 곧바로 돌아오기는 아쉬워서 자칭 강릉통이라는 친구의 추천으로 나와 아내 그리고 친구 같은 선배 누님, 이렇게 셋이서 하슬라 아트 월드라는 미술관을 찾았다.

같은 강릉이라 가볍게 생각했는데, 길이 생각보다 멀었다. 거기다가 아주 잠깐 빼꼼히 얼굴만 내비친 해가 사라지고 또다시 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살짝 망설여지려는데, 어느새 시작된 언덕길과 절벽, 그리고 멋진 바다 풍경에 감탄한 아내와 누님의 환호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런데 막상 입구에 들어서니 입장료가 생각보다 비쌌다. 거기다가 내 하얀 지팡이를 알아본 매표소 직원은 계단이 많아서 불편할 거라며 우리에게 미리 사과부터 했다. 맘속을 채워가던 망설임이 기어코 터져 나왔다.

"난 차에서 기다릴게. 둘이 보고 와. 날도 이런데, 굳이 나까지…."
"그게 뭔소리래?"

혼자 차 안에서 무슨 청승이냐고 타박하는 두 사람과 볼 수도 없는데 굳이 그 돈을 내고 들어갈 필요가 있느냐는 나 사이에 가벼운 실랑이가 시작됐다.

"아, 진짜…. 그럼 잠깐 기다려 봐."

한참 날 설득하던 누님이 갑자기 매표소를 향했다. 난 그냥 표를 사러 가는 줄로 알고 말리려 했지만 아내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할 수 없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냥 표를 구입하는 건 아니었는지 좀 길다 싶게 매표소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던 누님이 크게 웃으며 돌아왔다.

"흔쾌히 두 사람값으로 해 주셨어, 그러니까 넌 공짜, 됐지? 가자."

누님은 답도 듣지 않고 앞장섰고, 아내는 웃으며 내 팔짱을 꼈다. 간신히 바보를 면하는 순간이었다.

스테레오 설명


▲ 똑같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미술관 관람은 가능하다, 남의 눈과 입으로도 충분히.(하슬라 아트 월드 소장품) ⓒ 김승재

입구부터 두 사람의 감탄이 터져 나왔고, 곧이어 양옆에서 스테레오 설명이 시작됐다.

"와, 이거, 이거 멧돼진가?"

창밖으로 펼쳐진 멋진 바다 풍경과 이런저런 작품에 감탄하며 구경하던 누님이 소리쳤다.

"멧돼지? 그림? 조각?"
"그림은 아니고… 이게 도대체 뭐야? 멧돼지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그리고 이거, 엄청 큰 스테플러 철심 같은데… 그리고… 저기 뱃속에서부터 쌓아 올린 거 진짜 의자 맞나?"

아내가 작품으로 한 발짝 다가서며 말했고, 내 머릿속은 혼란에 빠졌다. 멧돼지 그림도 아니고, 그런데 생뚱맞게 엄청 큰 스테플러에다가 뱃속에 의자라니? 나름 고도로 숙련된 내 가상의 눈이라 자부했건만 도무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도대체 뭔 소리야? 멧돼지를 조각해서 스테플러로 고정했다는 건가? 근데 의잔 또 뭐고?"
"아니, 아니고. 잘 들어 봐. 어엄처엉나게 큰 멧돼지 같은 게 무지 무섭게 이빨을 드러내면서 입을 딱 벌리고 있어. 그런데, 털처럼 온몸에 커다란 스테플러 철심이 박혀 있어. 진짜 털 같아 보이기도 해."

누님이 설명을 보탰지만 헷갈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커다란 스테플러 철심? 그게 털처럼 보인다고?"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내가 보탰다.

"공사용 'ㄷ'자 철심 수천 아니 수만 개를 하나씩 하나씩 박아서 멧돼지 털처럼 보이게 만들었어."

질세라 누나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잘 들어 봐, 비록 스테플러 색, 그러니까 은색 그대로지만, 하나하나가 음영도 보이고 굴곡도 만들어서 멧돼지를 덮은 털 같아 보여."

한참 질문과 답이 오가고 나니, 어느 정도 그림이 그려졌다.

"그럼, 어떤 조각품, 어쩌면 나무 조각일지도 모를 멧돼지 조각에 공사할 때 쓰는 대형 스테플러 철심을 하나씩 하나씩 박아서 털을 표현했고, 뱃속에서 등을 뚫고 나온 것처럼 의자들이 쌓여서 천정으로 올라가는 것 같다 이거지?"
"그렇지."

"근데 그 의자는 뭐야?"
"아… 그러게…"

답은 했지만, 두 사람도 만족스럽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래도 그것은 마치 내가 직접 본 것처럼 아주 생생하고도 또렷하게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붉은색 노끈으로 마치 휘장인 양, 혹은 커튼인 양 전시관 전체를 작품으로 만든 곳에서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살짝 손으로 만져도 봤고, 밧줄이라기 보다는 큰 끈으로 이리저리 얽어 놓은 곳에서는 거대한 거미줄을 그려봤다. 좁은 철계단을 오르고 내리면서 도착한 온갖 꽃들이 만발한 전시관에서는 끝없이 터지는 사진 찍는 소리에 잠시 헛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여전히 생생하다


▲ 때론 가상의 눈들이 진짜 눈을 도울 수도 있는 일이다.(하슬라 아트 월드 소장품) ⓒ 김승재

야외 전시장, 비록 비바람은 여전했지만, 난 내 손에 맘껏 작품 감상할 기회를 주려고 우산을 포기한 채 비를 맞았고, 아내와 누님도 더욱더 큰 소리에 열정을 담아 모든 걸 설명하려 애써줬다.

"저기 절벽 끝에 자전거가 있네. 꼭 하늘을 날 것 같아."

아내와 누님이 동시에 감탄하듯 내뱉었지만 내 가상의 눈들은 조금은 다른 그림을 그려 주었다.

"절벽 끝… 하늘을 난다? 혹시 절벽 끝에 마치 다이빙 선수가 서는 스프링보드 같은 게 있고, 그 위에 자전거가 서 있는 거 아냐? 마치 절벽에서 바다로 다이빙하려는 순간처럼…"
"어머, 얘 진짜 보이네. 보여."

내 생각대로 자전거는 절벽에서 바다를 향해 돌출된 사다리 비슷한 구조물 위에 얹혀 있었고, 얼핏 보기에는 바다로 뛰어들려는 순간 같아 보인다고 했다

두 시간을 훌쩍 넘긴, 그런데도 조금도 지루할 틈이 없었던 만족스러운 감상을 마치고, 잠시 쉬려 들른 카페, 그런데 그 카페 앞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이 또 장관이었다.

"어떻게 보이는데?"

전망대 난간 앞에 선 내가 물었다.

"여기 빼고 나머지는 온통 바다. 하늘도 섞여버렸어. 구별이 안 돼."

가만히 눈을 감았다. 김민기가 그랬던가, '검푸른 바다 위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냐고. 가만히 눈을 떴다. 비바람과 파도 속에 하나로 어우러진 아름다운 바다와 하늘이 내 앞에 멋지게 펼쳐져 있었다.

넉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생생하다. 혹시 몇 년 후에는 이 머릿속 그림들이 진짜 내가 본 걸로 착각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그때 아내와 누님이 아니었다면 난 다시 바보 멍청이 쪼다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웬만하면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특별한 해설


▲ 용기를 내서 나선다면 도움은 충분하다. 그것도 아주 고품질의 최고급으로 말이다. ⓒ 김승재

아내와 난 성남아트센터를 자주 이용한다. 성남시향 정기 공연은 거의 빠뜨리지 않았고, 시간만 허락하면 연극도 다른 공연도 내 발로 찾아간다. 그리고 이제는 미술관에도 단골이 되려 한다.

몇 달 전, 처음 미술관을 찾았을 때는 동행한 아내나 친구의 설명을 들으면 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만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1층 전시실, 친척 중에 나 같은 시각 장애인이 있다는 도슨트께서, 작가의 허락을 받았다며 작품을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특권까지 선물해 주셨다.

모처럼 호강한 내 가상의 눈들 덕분에 더욱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찾아간 2층 전시실, 그곳에서는 작품에 관한 지식에 더해 관록 있는 경험까지 포장된 작품 해설이라는 선물을 받았다.

물론 다른 분들도 도슨트의 해설을 듣겠지만, 하얀 지팡이를 알아본 그분들은 내게는 더더욱 특별한 해설을 해 주셨고, 가끔은 내가 작품을 만져서 느낄 기회까지 허락해 주셨다.

지난달에도 아트센터 미술관에 들렀다. 새로운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고, 나는 아내의 도움을 받아 천천히 나만의 방식으로 작품들을 둘러보는데,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죠. 그건 저절로 그런 소리가 나오는 작품이에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다가온 도슨트께서는 뚱딴지같은 내 질문에도 여유 있는 웃음으로 친절한 설명을 해 주셨고, 나와 아내가 이미 보고 온 작품들까지 마치 대화를 나누듯 설명하고 답을 해 주셨다.

"지난번에도 오셨었죠? 그때도 제가 설명해 드렸는데…. 저도 보이지도 않는 분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들어와서 작품들을 둘러보는데 놀랐네요."
"그럼요, 당연히 기억하죠. 그리고 오늘도 정말 감사합니다."

어찌 그 목소리를 잊을 수 있겠는가. 정말 보너스치고는 엄청난 보너스를 받았다.

난 운이 좋다. 사실 나 같은 행운을 누리지 못하는 장애인들이 엄청 많다는 걸 안다. 이렇게 즐거운 기억 속에서 마냥 웃다가도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리고 그만큼 열심히 살자고 나 스스로를 격려해 본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2년 12월 06일, 화 7:32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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