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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 종교
 
복잡한 현대 신학이 교회에 안정감을 줄 수 있을까요?
[길의 가장자리에서] 현대 신학에 기반한 교회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서울=뉴스앤조이) 김동환 목사

1. 신학은 어떤 효과를 일으킬 만한 힘이 있을까요?

이번 글에서는 '신학과 교회'라는 주제로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신학생이나 목사들이 대체로 그렇겠지만, 저는 현실보다는 이론을 중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현대사회에 적용이 될 수 있든 없든, 고대 교부들의 신학 논쟁이 재밌었고, 종교개혁 시대의 토론들이 재밌었습니다. 특히 장로교 전통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다 보니 자연스레 장로교 전통의 교리 체계를 공부하는 데 시간을 썼는데요. 장로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는다는 것은 장로교 전통에 맞는 성경 해석과 교회 운영 방식을 숙달하고 그에 합당한 자격증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목사가 되기 전에 처음 신학을 공부할 때는 장로회신학대학교 말고도 연세대학교·숭실대학교 등 다양한 곳에서 공부하며 견문을 넓혔는데요. 막상 목사가 되고 교회에서 어떤 역할을 맡다 보니, 제가 직접 가르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범위의 공부에 집중하게 됐습니다. 시야가 상당히 좁아졌던 거죠. 제도권 교단에서 공부하는 신학생 대다수가 겪는 과정일 것 같은데요. 학생 때는 이것저것 자유롭게 공부하지만 목사가 되고 교회에서의 지위가 생겨나면서부터는 자기 교파·교단의 정통성에 맞는, 그리고 교회가 허락한 범위 안에서 공부와 실천을 반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교회 개척과 함께 코로나 팬데믹을 맞이하면서, 그리고 교단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내가 그동안 쫓았던 신학 이론들이 현실에서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됐습니다. 그렇게 '신학은 생각보다 힘이 없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공부한 내용들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나 자신에게 효과가 있는지, 앞으로 어떤 신학을 공부해야 할지, 그 신학이 어떤 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지 검증하면서 길을 찾아봐야 겠다' 하는 식으로 생각이 조금씩 바뀌게 됐지요.

지난 2~3년간은 '현대 성서학'에 관심을 갖고, 오늘날 신학자들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다시 공부했는데요. 아직까지는 재밌어서 다행이지만, 공부해야 할 게 너무 많아서 난감한 면도 있습니다. 상술한 대로, 이러한 현대 성서학이 바쁘게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유의미한 효과를 일으킬 수 있을지 체크해 가면서 모임을 운영하고 있고요.




제가 처음 신앙생활을 하도록 도와준 공동체는 대학 시절 만난 한국기독학생회(IVF)였습니다. 지금은 '20대에 열심히 활동했던 IVF와 같은 편안한 모임을 만들어 보자! 다만 거기에 현대 성서학을 더해 보자!' 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길섶교회에 참여하는 구성원이 점점 다양해지고, 그전에는 하기 힘들었던 질문과 대화가 가능해지는 것을 보면서, '현대 신학의 어떤 효과(?)가 발생하는구나' 하는 체감도 조금은 하는데요. 그와 동시에 모임에 전통과 역사가 없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불안'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전보다는 덜하지만 '이 모임이 지속가능한가'라는 질문도 한 번씩 떠오르고요.

그렇다면 방대하고 복잡해 보이는 현대 성서학이 (기존 제도권 교회의 전통만큼은 아니더라도) 일정 부분 교회의 안정감을 확보해 줄 안전장치가 될 수 있을까요? 지금부터 이 물음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2. 교회 전통 vs 현대 신학

우선 '현대 신학'이 무엇인지, 그리고 현대 신학을 중점으로 하는 교회가 기존 제도권 교회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현대 신학은 '요즘' 신학입니다. 시간을 확정할 수는 없으니 간편하게 최근 100년 사이에 나온 신학 담론이라고 할까요? 신학에도 조직신학·역사신학·실천신학 등 여러 분과가 있지만,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가장 중요한 저는 최근 100년 사이에 나온 '성서학'의 논의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이제부터는 '현대 성서학'을 '현대 신학'이라는 말로 사용하겠습니다). 성서를 학문적인 방법으로 연구하는 '역사 비평'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만, 특히 최근 100년 사이에는 쿰란문서·나그함마디문서 등 성경 시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고대 문헌 자료와 다양한 고고학·역사 자료가 새롭게 발견되고 있습니다. 고대 자료들을 토대로 성경을 다시 해석해 보는 연구들이 유의미한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기존 제도권 교회는 현대 신학을 아예 안 하냐?'라고 하면, 당연히 그런 말은 아니고요. 모든 교회가 이와 같은 현대 신학을 토대로 하지만, 차이점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예배 순서를 정한다거나, 세례를 줄 때 교단 전통에 맞는 교리문답을 공부해야 한다거나, 목사의 역할과 의복 등을 정할 때, 교회의 '관례'를 따르는 것에 더 무게중심을 둔 교회들이 전통적인 제도권 교회겠지요.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느냐'를 두고 우선순위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도권 교회도 현대 신학을 연구하지만, 본질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전통을 따르기 때문에 '안정감'을 갖는 장점이 있겠습니다.

반대로 전통도 없고 얄팍(?)하지만, 최근에 논의되는 다양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그에 따라 교회 운영 방식을 재구성해 가려는 길섶교회 같은 현대적 교회도 있습니다(저는 여러 제도권 교단 내에서 개척한 목사님들이 분명히 이런 부분을 고민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교회들은 기성 교회에 비해 안정감은 떨어지지만, 다양한 세대의 고민을 들으면서 제도권 교회가 하지 못했던 것들을 자유롭게 시도해 볼 수 있겠지요. 이를테면 성찬을 안 한다거나 공동 성찬을 한다거나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전통보다는 현대 신학에 무게중심을 두고, 공동체를 자유롭고 유연성 있게 운영하는 교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기존 제도권 교회들도 아주 소중하고,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전통을 가볍게 여기는 저희 같은 교회의 숙제는 '과연 근본 없음(?)으로 초래되는 불안과 신뢰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일 텐데요. 한편으로는 현대 신학을 신속하게 업데이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겠으나, 과연 이러한 효과가 그 불안감을 완화해 줄 수 있을 것인지가 저희 같은 교회의 생존이 달려 있는 질문이겠습니다.




3. 현대 신학의 효과(1): 문자주의 넘어서기

교회가 현대 신학을 토대로 한다면 어떤 효과를 예상할 수 있을까요? 먼저는 '문자주의'를 극복해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보통의 제도권 교회보다 조금 더 '빨리' 말입니다). 오늘날 전문 신학자 그룹에 '문자주의자'는 없으니까요. 설령 있다 하다더라도, 그런 사람은 신학자들의 공론장에 나올 수 없겠지요.

'성경에 있는 모든 문장을 과학적 사실로 보고, 있는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한다면, 성경은 시작부터 모두를 시험에 들게 합니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7일 창조 이야기'에 따르면, 우주의 모든 별보다 지구가 먼저 만들어져야 하니까요. "하나님께서 모든 종을 그 종류대로 만드셨다"는 창세기의 신앙고백적 기술이 어떤 맥락·의미에서 전승되고 기록됐는지, 고대 신앙 공동체에 어떤 효과를 일으켰을지 상상해 보고, 오늘날 우리가 이 신앙고백을 어떻게 재해석할 수 있을지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 현대 신학입니다.

이렇게만 말씀드려도 '현대 신학은 교회를 위험에 빠트린다', '교회의 창조 신앙을 흔들 수 있다'고 말하는 분이 계실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요, 아이들은 초등학생 때부터 학교에서 생물의 진화를 배웁니다. 공룡도 좋아합니다. 우주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우주의 역사를 공부를 합니다. 책에 없어도 유튜브로 교양 과학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첫 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서부터 이미 현대 신학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3000년 전 성서 시대 세계관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현대의 과학적 사실을 거부하게 한다면, 신학도 과학도 모두 거절하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죠.

교회 전통에서도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해 왔는데요. 유독 '아담과 하와 이야기'는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고대 교부들도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일로 자연 세계에 죽음이 들어온 것인가'를 두고 토론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원죄론'과 같은 교리가 그 시대에 만들어졌다 한들, 현대 신학에서는 그 담론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교리·전통도 시대에 따라 새로운 연구가 쌓이면 수정과 변화를 요청받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보수적인 신학교라고 할지라도, 아담과 하와를 실제 역사적 인물로 생각하는 구약학 정교수가 있을까요? 만약 그런 사람이 교회가 아닌 일반 공중파 방송에 나가서 "인간은 최초에 남자가 먼저 만들어졌습니다. 그게 바로 아담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요? 공론장에서는 말할 수 없는 내용을 목사들은 왜 교회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살벌한 눈빛으로 외쳐 댈까요?

현대 신학을 적용해야 한다는 말은 성경을 읽는 선량한 사람들을 대혼란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공부해야 할 내용이 너무 방대해서 혼란스러운 부분이 있는 것은 맞지만, 그럼에도 성경을 '오늘, 우리의 이야기'로 재해석하기 위해서는 현대 신학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창세기 1장에는 '혼란에서 질서를 만드시는 7일 창조의 시'로서, 노동과 쉼의 창조, 비폭력적이고 질서 정연한 창조라는 신앙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는 창조를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이야기 방식의 신앙고백이 담겨 있지요. 두 이야기 모두 글의 스타일이나 세부 내용은 다를지라도, 성경 전체 이야기와 어울리는 창조에 대한 감각적인 신앙고백인데요. 이것을 갖고 자꾸 '현대 진화 생물학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식으로 가르치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빅뱅 이론'이든 '진화론'이든 일반 사회에서 교양으로 공유하는 지식을 믿고 안 믿는 개인의 자유지만, 성경의 신앙고백을 과학 논문으로 바꿔 버리는 것은 현대 신학에서 수용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처음부터 현대 신학적 방법론으로 성경을 읽기 시작한다면,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겪게 되는 고민을 내려놓을 수 있고, 과학을 전공하는 교인들 또한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겠지요. 반대로, 현대 신학을 수용하지 않는 교회에서는 과학 전공자들을 반신앙적인 사람으로 낙인찍는 효과가 발생하는데요. 만약 교회에 과학 전공자 수가 적거나, 그들 입장에서 과학과 신앙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게 부담스럽다면, 이미 그런 효과가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 신학의 일반적인 합의 사항을 고려해 '성경의 정의'와 '성경을 믿는다는 것'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제가 제시해 보는 하나의 가안입니다.

"'성경'은 기독교의 경전입니다. 기원전 1000년 동안 다양한 장르(법·이야기·시 등)로 쓰인 고대 유대 민족의 신앙고백문 구약성경(히브리성경)과, 기원후 150여 년 사이 기록된 복음서와 편지글의 모음인 신약성경이 있습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외에도 신앙 공동체에서 읽히고 보전돼 온 다양한 문헌을 살펴봄으로써, 성경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고대 신앙고백문을 문자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일차적으로는 그 신앙고백의 본래 뜻을 상상해 보고, 이차적으로는 그것을 오늘 우리 상황에 맞게 재해석해 일상에서 적용·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4. 현대 신학의 효과(2): 비폭력적 평화 공동체

교회가 현대 신학을 토대로 할 때 기대할 수 있는 또 다른 효과는, 비폭력적인 평화 공동체가 될 가능성을 높여 준다는 점입니다. 현대 신학은 해석의 다양성과 열린 가능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문자주의·교조주의가 아니면서도 성경을 존중하고 신앙을 형성해 나갈 수 있는 제3의 길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현대 과학에서 '노아의홍수'와 같은 전 지구적 홍수는 없었다고 말하듯이, 현대 고고학에서도 '가나안 정복 전쟁'은 역사적 근거가 없다고 말합니다. 현대 신학은 현대 고고학이 말해 주는 근거 위에서,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체성과 관련된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전쟁의 의미를 해석하고자 분투합니다. 출애굽의 열 가지 재앙과 가나안 정복 전쟁은 신앙 공동체의 입장에서는 탈출과 해방이지만, 고대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에게는 학살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노아의홍수 이야기가 그렇듯) 신앙 공동체가 남긴 특별한 장르의 신앙고백문이라면,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과 공동체의 관계, 하나님의 성품을 고대 세계관에 들어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왜 정복 전쟁 이야기에 이방 여인 '라합'이 등장하는지, '아간'처럼 불순종한 내부인에게 '진멸(헤렘)'의 명령이 적용되는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 묻는다면, 구약의 하나님을 단순히 폭력적인 신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 구약학자들은 구약에 수많은 폭력에 관한 구절이 담겨 있음에도, 이 신앙고백문들이 신을 폭력적으로 이미지화한다고 결론 내리지 않습니다. 2세기의 마르시온처럼 구약성경을 버리자고 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현대 신학이 말하는 바를 어느 정도 이해한 상태에서 성경 읽는 훈련을 한 번이라도 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성경을 해석할 때 어떤 신중함을 가져야 할지, 수천 년 시차를 극복해서 오늘 우리 상황에 적용할 때 어떤 점을 주의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구절을 현대 신학 방법론으로 연구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 어느 책이든, 어느 장이든, 딱 한 번만이라도 고대 신앙고백문과의 시차를 적용해 읽고 재해석하는 경험을 해 보면, 성경을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게 무엇인지 감이 생길 수 있습니다.

신학을 공부한 지 10년 차가 되는 저조차도 아직 성경에 대해 모르는 게 아주 많습니다. 앞으로 어떤 공부를 해 나가야 할지 약간 감이 생긴 정도입니다. 성경 일부분만이라도 현대인의 감각과 수준에 맞게 해석하고 묵상할 수 있게 되면, 나머지 부분도 천천히 알아 갈 것을 기대하며 한 걸음씩 내딛을 수 있는 것이죠. 문자주의 신앙 공동체에서는 현대 신학을 배제함으로 불안을 삭제하고, 마치 모든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평안을 누리지만, 그러한 평안은 언제든 누군가에게 정신적·물리적 폭력을 행사할 수는 '불안한 평안'일 뿐입니다.

5. 현대 신학의 효과(3): 어떤 예수님을, 어떻게 따를 것인지도 개인이 정한다

현대 신학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을 내놓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 자체와 예수님이 공생애 활동 가운데 하신 말씀과 사역 모두를 비슷하게 중요시하는 편입니다. 부활의 실재성을 전제하고, 부활의 의미를 토대로 예수님의 메시지·활동이 왜 특별한지 역추적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는데요. 어떤 면에서는 전통적인 방식이기도 합니다. 현대 신학이라고 해서 꼭 급진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제가 최근에 관심 있게 보고 있는 것은 '에녹 세미나'라는 그룹입니다. 이 그룹에 속한 학자들은 제2성전기 문헌에 대한 연구를 토대로 1세기의 세계관을 재구성하고,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데요. 저는 예수님 부활의 실재성을 전제로 하다 보니, 앞서 말씀드린 노아의홍수나 여리고 정복 등에 대한 해석이 자유로워도 제 신앙의 열정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 편입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에 신앙의 무게중심을 두기보다, 예수님께서 살아생전 하신 말씀과 행동을 더 중요하게 보는 분도 계십니다. 저는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물론 주관적인 의미에서의 사실입니다), 주일에 교회를 나오기보다는 풋살 모임에 다녔을 것 같은데요. 이런 의미에서 역설적으로, 죽음과 부활 사건 자체보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동에 집중하는 분은 굉장히 깊이 있는 종교적 태도를 가지신 분이기도 합니다. 저희 교회는 이러한 분들의 신앙을 존중하기 위해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저는 사도신경을 매우 좋아하지만, 고대 신앙고백문 중 하나인 사도신경이 예수님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를 생산해 내고 있다는 비판에도 일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을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때, 나는 어떤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예수님의 어떤 모습에 내 신앙의 무게중심을 둘 것인가, 예수님을 따르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신앙의 중심적인 내용은 신앙인 개인이 정해야 할 몫입니다. 현대 신학은 이 답변에 다양한 입장의 대답을 내놓고 있고요(너무 다양해서 약간 피곤하긴 합니다). 그 말인즉슨 2023년을 살아가는 지구상의 어떠한 인간도 '예수님은 이런 분이시다'라고 확정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최선을 다해 예수님을 알아 가려 노력하고, 예수님 따르는 삶을 일상에서 실천하고, 그 과정을 교회에서 공유하고 피드백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현대 신학을 토대로 하는 교회라고 한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의 의미도 이렇게 다양할진대 어떠한 교리적인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서두에서 말씀드렸듯, 이런 교회의 치명적인 숙제는 '불안'의 문제고, 솔직히 아직까지 해결책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생각에는 교회가 현대 신학을 토대로 할 때 발생할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가 꽤나 괜찮아 보이는데,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가요? (본보 제휴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3년 5월 02일, 화 4:32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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