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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 문화
 
박정희는 '강화돈대'에서 반미주의자가 됐다
[서평] 다큐멘터리 사진가 이상엽의 신간 <강화돈대>


▲ 이상엽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의 신작 <강화돈대>. ⓒ 교유서가

(서울=오마이뉴스) 구영식 기자 = '강화를 여행한다면 꼭 가봐야 할 곳'으로 '연미정'(燕尾亭)을 꼽는 이들이 많다. '강화 8경' 중 하나인 연미정은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정자로, 물길이 흘러가는 모양이 제비꼬리와 비슷하다고 해서 '연미'라는 이름을 얻었다. 고려시대 때 지어진 정자로 조선시대 삼포왜란 때 전라좌도방어사로 공을 세운 황형 장군에게 하사됐다. 정묘호란(1627년) 당시 연미정에서 조선의 대표와 후금의 사신들이 화친조약을 위한 예비회담을 열었고, 병자호란 시기에 나온 전쟁소설 <강도몽유록>의 배경이 연미정이었다는 점은 미리 알아두자.

연미정에 갔다면 가야 하는 '강화 8경'이 더 있다. 연미정의 동남쪽에 자리한 '월곶돈대'다(연미정은 월곶돈대 안에 있다). 낯설게 느껴질 '돈대'(墩臺)는 조선시대 때 해안방어를 위해 지은 군사기지다. "작은 규모의 성곽 형태를 갖춘 군사시설"(<강화돈대>)이라고 할 수 있다. 돌을 원형이나 장방형으로 쌓고 성곽면에 포좌 등을 설치했고, 봉수시설도 갖추었다.

<강화돈대>(이상엽, 교유서가)의 저자는 강화에 축조된 '54돈대'에서 특별히 17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중반까지의 동아시아를 읽어낸다. 동아시아의 근대 시기라는 19세기 중반에 난징조약(1842년), 미일수호통상조약(1858년), 강화도조약(1876년) 등의 불평등조약이 맺어졌는데, 그 역사적 고통의 현장에 강화돈대가 있었다는 데 깊이 주목한다. 저자가 "돈대는 돌아다니던 1년 내내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의 대상이었다"라고 고백한 이유다. 다크 투어리즘이란 '인륜의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이나 재난 또는 재해가 일어났던 장소를 돌아보는 여행'을 뜻한다. 저자에게 강화돈대는 '강화 8경'의 낭만성을 뛰어넘는 중요한 역사적 공간이다. 책 속에 실린 흑백의 돈대 사진들은 그 공간의 역사성을 깊이 들여다보게 만든다.

강화돈대는 조선의 당파들이 동아시아 정세에 반응한 결과


▲ 분오리돈대의 전경. 동쪽으로 자연암반을 이용해 석축함으로써 절벽을 이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지형지물을 잘 활용한 결과다. ⓒ 이상엽

강화돈대는 조선시대 숙종 때 52개소가 설치됐다. 병자호란(1636년) 이후 강화도가 '보장처'(保障處, 전란 때 임금과 조정이 대피하는 곳)로서의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강화도 해안을 따라 돈대를 축조해 '5진.7보.52돈대'를 완성함으로써 섬 전체를 요새화했다. 이후 영조와 고종 때 각각 작성돈대와 용두돈대를 추가로 설치해 '54돈대'가 됐다. 왜 '숙종' 때 '강화'에 돈대가 대거 축조된 것일까.

"17세기 후반 조선 숙종 때 기존의 성곽구조에 약간의 변화가 나타났다. 돈대가 성곽 주변의 중요한 지점에 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강화도는 지정학적 특수성으로 인해 왕의 보장처로 인식되었다. 중국의 정세가 불안정했던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 강화도에는 수많은 방어용 건축물이 지어졌다. 이른바 '변방의 방비를 위해 설치한 요새'인 관방시설로 분류되는 성곽과 군영인 진과 보가 50여년 간 지속적으로 건설된 결과, 강화도는 민간마을보다 군사시설과 행정시설의 밀도가 매우 높은 요새형 성곽도시로 변모되었다."(<강화돈대> 48쪽)

숙종의 강화돈대 설치에는 당시 동아시아 정세가 크게 작용했다. '명청 교체기'에 명나라 사대에 치우친 조선의 외교로 인해 정묘호란(1627년), 병자호란(1636년) 등의 '전쟁'이 일어났다. 상상을 초월하는 전쟁의 피해에도 불구하고 효종과 숙종 때에는 북벌론까지 대두했다. 그래서 저자는 "병자호란이라는 치욕과 북벌이라는 설욕 사이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돈대"라고 주장했다. 대전환기이자 격변기였던 동아시아 정세에 민감하게 반응한 조선의 당파들에 의해 강화돈대가 설계되고 축조됐다는 얘기다.

특히 저자가 강화돈대의 기원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강화돈대와 대만 동녕국 '정경'의 연관설을 제기한 대목은 흥미롭다. <숙종실록>에 45번이나 언급되는 정경(정금)은 대만을 네덜란드에서 독립시킨 무장 정성공(복건성 출신)의 아들이자 동녕국의 2대 왕이다. 그런데 숙종 1년 때부터 정경이 조선을 정벌하러 온다고 하고, <정감록>에서 조선을 통치할 인물로 지목한 '정진인'(鄭眞人)이 정경이라는 소문이 크게 나돌자 숙종이 강화도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중국의 방어시설(명나라의 '돈후')을 본 떠 돈대 설치를 계획했다는 것이다. 다만 저자는 "정말 정경 때문이었을까?"라고 여운을 남기면서 흥미로운 상상력을 발휘한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끝까지 지키기 위한 조선의 모습이 강화돈대에 암호처럼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정경의 침입을 두려워한 것은 사실이지만 효종 이후 군비를 강화한 조정이 그리 무력하지만은 않았다. 혹여 복건성 일대에 도피해 있을지도 모를 명나라의 마지막 주씨 황족이 대만의 정경을 거쳐 조선으로 올 수도 있지 않을까? 명나라의 의미를 생각하면 결코 돌려 보낼 수는 없으므로 청나라와의 전쟁이 불가피해진다. 따라서 명나라의 후손과 조선의 왕을 위한 보장처로 강화도를 정비한 것은 아니었을까? 엉뚱하지만 이같은 상당도 해보았다."(<강화돈대> 103쪽)

김석주와 윤휴, 병권을 둘러싼 왕과 당파들의 싸움

물론 강화돈대가 축조된 데에는 동아시아 정세뿐만 아니라 "조선내의 실제적 요인"도 작용했다. 저자는 그와 관련해 '김석주'(서인)와 '윤후'(남인)를 주목한다. "조선내의 실제적 요인"이란 "병권을 둘러싼 왕과 당파들의 싸움"이고 그 중심에 김석주와 윤휴가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강화도에 돈대를 축조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이들은 윤휴 등 남인들이다. 특히 윤휴는 현종 15년(1674년)에 "즉각 군사를 일으키자" "병사 1만을 뽑아 북경을 향해 나아가 등을 치고 목을 조이자" 등 북벌을 주장하는 비밀상소를 올릴 정도로 강경한 북벌론자였다. 그가 숙종 1년(1675년)에 도체찰사부의 설치를 주장한 것도 북벌을 위한 것이었다. 저자는 "남인들은 군권 장악과 장기 집권을 위해 대흥산성 축조와 함께 강화유수에게 병권을 주고 돈대를 쌓는다는 핑계로 강화도 진무영(군대)까지 접수하려고 했다"라며 "따라서 숙종은 남인에게 쏠리는 병권을 김석주에게 적절히 배분했다"라고 짚었다.

숙종의 배려에 따라 김석주는 병조판서와 어영청을 장악하고 남인들의 도체찰사부를 혁파했다. 강화도에 돈대를 쌓자고 건의한 그는 강화돈대 축조의 책임자가 되어 강화도를 직접 답사하고, '강도설돈처소별단'이라는 보고서를 숙종에게 올렸다. 이것은 상세한 지형과 돈대 포인트를 그림으로 설명한 보고서였다.

"그는 이 공사를 자신의 어영청 군사까지 동원해 80여일 만에 끝냈다. 김석주는 이렇게 강화도 진무영의 군권까지 접수했다. 숙종과 김석주의 합작에 윤휴는 어찌 반응했을까? 당연히 백성들의 고초를 들어 반발했으며, 내심 분풀이할 기회를 노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김석주는 경신환국을 일으켜 윤휴를 비롯한 대다수의 남인들을 제거했다."(<강화돈대> 141쪽)

저자는 "그동안 경신환국((庚申換局, 1680년)은 서인과 남인 사이의 치열했던 당쟁의 산물로만 인식되고 있었었지만 당시 청나라의 정세와 환국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해석도 제기되었다"라고 강조했다. 당시 반청의 기치를 들고 일어난 '삼번(三藩)의 난'(亂)이 진압된 것도 경신환국의 중요한 배경이었다는 것이다. 삼번의 난(1673년~1681년)이란 청나라 초기 운남.귀주의 오삼계, 광동의 상가희, 복건의 경중명 등 삼번이 중심이 되어 청나라에 대항해 일으킨 난으로, 청나라의 강희제가 이 난을 진압하고 중국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렇듯 삼번의 패배가 기정사실이 되자 숙종은 북벌을 위한 도체찰사부를 남인들이 역모를 꾸민 공간으로 만들고, 북벌론자였던 윤휴를 사사함으로써 청나라의 의심에서 벗어나려는 나름의 의도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142쪽)

죽도록 일했을 승군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아


▲ 54개 강화돈대 중에서 유일하게 축조 주체와 시기가 명기된 계룡돈대. ⓒ 이상엽

저자는 김석주와 윤휴 외에도 강화돈대를 기획하고 축성을 지휘한 인물로 김수흥(서인,강화유수), 이인척(서인, 통훈대부행선공감직장), 유혁연(남인, 선천부사), 허적(남인 영수), 이원정(남인, 형조판서), 윤이제(남인, 강화유수) 등을 꼽았다.

하지만 단 80일 만에 수십개의 돈대를 축조한 데는 "죽을 고생한 승군"이 있었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했다. 조선 전기부터 왕릉이나 정부의 건물을 지을 때 승려를 동원해왔다. 당시에 승군역은 군역이라기보다는 노역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는 승려들에게도 군역을 맡겼다. 17세기 후반에는 남한산성에 위치한 수어청(守禦廳)에 승려를 상비군으로 주둔시키는 의승역(義僧役)도 실시됐다.

돈대 축성에는 어영군 4262명과 석공 1000명, 목수 등 잡부 1000명 등이 동원됐는데 특히 승군은 무려 8900명이나 참여했다고 한다. 저자는 "승군은 40일 만에 여장을 제외한 돈대 작업을 마쳤다, 정말 죽도록 일했을 것이다"라며 "이 노역에서 승군이 동원되었다는 것이 더 놀라운 일이다"라고 썼다.

"돈대를 내려오며 돌이켜보니 돈대를 쌓으면서 죽거나 다친 승려가 얼마인지 아무도 기록하고 기억해주지 않았다. (중략) 54개의 모든 돈대를 찾아 헤맸다. 300년 전 전 조선의 어느 절집에서 징발당해 강제 노역에 처해졌을 승려의 손으로 만들어진 이 돌덩어리가 자연의 풍화뿐만 아니라 변경의 오욕을 모두 목격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강화돈대> 168쪽. 352쪽)

돈대와 조선의 운명을 결정지은 '운요호'와 '요시다 쇼인'

강화돈대는 19세기 중반기에 근대를 맞이했지만, 그 근대는 강화돈대의 수난사였다. 시작은 1866년(고종 3년) 병인양요(丙寅洋擾)였다. 프랑스는 프랑스인 신부 9명과 천주교 신자 8000여 명을 처형한 병인박해에 항의해 중국에 주둔중이던 극동함대를 파견해 강화도를 공격하며 전쟁을 일으켰다. 저자는 병인양요를 "근대의 관문에서 최초로 일어난 서양세력과의 폭력적인 만남"이자 "이 나라의 서구식 근대의 출발점"이라고 표현하면서 "기독교 선교와 제국주의 침탈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꼬집었다.

또한 5년 뒤인 1871년에는 미국이 제너럴 셔먼호 격침(1866년)에 항의하고, 강제로 개항시키기 위해 강화도를 침공한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났다. 특히 엄청난 포사격 교전이 이루어진 신미양요에 이어 1875년 운요호사건까지 발발하면서 강화돈대는 크게 파괴됐다. 운요호사건이란 일본의 군함 운요호가 조선 해안 탐사를 명분으로 강화도 등을 습격한 사건이다. 다음해(1876년) 조선과 일본은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다.

"나라의 운명이 다한 것인지 일본과의 '강화도조약' 후 열강들의 각축장이 된 조선은 국운이 기우는 일만 남게 되었다. 돈대는 비었고 더 이상 관방시설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268쪽)

강화돈대와 조선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운요호'와 대표적인 정한론자인 '요시다 쇼인'이었다. 요시다 쇼인은 조슈번(지금의 야마구치)의 하급무사였는데 막부 말기 존왕양이((尊王攘夷, 천황을 받들고 외세를 배격하자는 뜻)를 외치며 역모를 꾀하다 사형당했다. 하지만 그의 제자들이 메이지유신에 성공하면서 그는 '유신의 스승'이 됐다. 그의 정한론을 추종하는 이들이 운요호를 타고 강화도를 침범하고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을 맺었다.

박정희가 보수한 돈대는 거의 창작에 가까워


▲ 군의 시설물이 남은 의두돈대. ⓒ 이상엽

그렇게 무너졌던 강화돈대가 극적으로 부활한 것은 흥미롭게도 박정희 정권 시기였다. 강화돈대 부활의 뒤에는 박정희의 역사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퇴영과 조잡과 침체의 연쇄사"이고 "고식, 나태, 안일, 무사주의로 표현되는 소아병적인 봉건사회의 한 축도판"이라던 그의 역사인식은 1960년 말부터 "창조, 협동, 애국은 우리 선조들이 지켜온 역사적 유산의 중심 가치"로 바뀌었다. 박정희는 왜 민족의 긍정적 측면을 적극 강조하는 쪽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일까?

"박정희의 입장이 이같이 변한 이유는 처음 혁명의 당위성을 입증하기 위해 민족사를 부정했지만, 곧 자신이 기획한 혁명의 완수를 위해서는 '민족공동체'적인 숙명에 호소하며 역사를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강화돈대> 310쪽)

박정희는 5.16 군사쿠데타에 성공한 이후 '민족적 성웅 만들기'와 함께 사적지 성역화사업에 나섰다. 화랑, 이순신, 세종대왕, 신사임당, 율곡 등을 '영웅'이나 '성인'으로 만들었고, 1976년부터는 '강화도 유적 보수정화사업'을 시작했다. 10억 원의 사업비로 고려궁지, 덕진진.초지진, 광성보, 삼랑성 등을 발굴.복원.정비했다. 주로 대몽항쟁과 대원군 시기 병인양요.신미양요 관련 전적지였다. 여기에 강화돈대도 포함됐다.

"하지만 이때 수리된 돈대 등은 엉터리 복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강화교에서 가까운 몇 개의 돈대에 그쳤다. 대다수의 돈대 유적은 방치되거나 해병대의 초소로 활용되면서 원형이 파괴되고 유실되었다. (중략) 1970년대 박정희가 보수한 돈대는 거의 창작에 가까워서 그 독보적이거나 독창적인 원형이 훼손된 상태다."(<강화돈대> 313쪽, 329쪽)

흥미롭게도 저자는 박정희가 미국과 직결된 신미양요에 주목한 이유를 짚었다. "반공에 입각한 박정희가 왜 미국에게 당한 신미양요에 주목했느냐"라는 의문이다. 저자의 답변은 "반미"였다.

"반미인가? 사실 그랬다. 미국에 카터 정부가 들어서고 박정희에 대한 압박은 심해졌다. 미군 철수 이야기도 나왔다. 이에 박정희는 핵무기 개발 카드를 꺼내들었는데 신미양요라는 역사적 팩트를 함께 들고나온 것이다. 정말 아이러니한 대목이다. 특히 그는 미국에 의한 사상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용두돈대를 돌아보고 친필로 전적지 정화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돈대가 민족주의로 참 피곤하다. 우리는 현재 또 어떤 민족주의로 우상을 세우고 있나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강화돈대> 313~314쪽)

54개 중 40개는 점검조차 안해… 이것이 돈대의 현실

저자는 지난 2015년부터 책을 낸 최근까지 강화돈대를 둘러보며 공부하고 사진으로 기록했다. 그러는 동안 강화돈대의 가치도 커져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시도되고 있다. 인천시가 강화도 방어시설인 진.보.돈대.산성을 '강화해협 관방유적'으로 묶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고 한다.

저자는 "지금까지 강화도의 돈대를 둘러본 나의 판단으로는 조선 후기 그리고 근대라는 시공간에서 건축적 가치가 있고 경관도 탁월한 사례"이고 "인간이 바다를 이용해 스스로를 지키려고 했던 독창적인 아이디어"라고 평가했다. 다만 인천시가 추진하려는 해안관방유적의 범위가 너무 넓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돈대'에 집중할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54개 강화돈대 중 시나 군의 유적 지정으로 보호받고 있는 것은 14개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14개 시.도 지정문화재 점검이 실시된 것은 2014년 8월이었고, 당시 조사에서 A등급을 받은 돈대는 하나도 없었다. 정밀진단과 긴급수리가 필요한 E등급은 6개나 됐고, 나머지 8개 중 B.C 등급은 각각 4개씩이었다. E등급을 받은 돈대 중 건평돈대, 북일곶돈대, 화도돈대는 아직까지 보수공사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시.도지정문화재가 아닌 나머지 돈대 40개는 점검대상에서조차 제외돼 있다는 점이다. 돈대 주변의 사유지 문제, 군부대의 지나친 돈대 점유 등의 문제도 있지만, 저자는 "이것이 돈대의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54개의 돈대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해주는 일이 필요한지 모른다.

의두돈대 철북돈대 삼암돈대 망양돈대 망해돈대 제승돈대 월곶돈대 옥창돈대
갑곶돈대 염주돈대 분오리돈대 갈곶돈대 북장곶돈대 초루돈대 송곶돈대 미곶돈대 건평돈대 굴암돈대 작성돈대 구등곶돈대 석각돈대 계룡돈대 송강돈대 검암돈대
무태돈대 망월돈대 휴암돈대 적북돈대 낙성돈대 숙룡돈대 소우돈대 빙현돈대
초지돈대 덕진돈대 후애돈대 양암돈대 석우돈대 천진돈대 손돌목돈대 광성돈대
장자평돈대 섬암돈대 택지돈대 동검북돈대 광암돈대 인화돈대 가리산돈대
좌강돈대 용당돈대 장곶돈대 북일곶돈대 미곶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 <강화돈대>의 저자 이상엽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 이상엽

저자 이상엽 작가는 다큐멘터리 사진가이자 로포르타주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1991년부터 월간 <사회평론길>에서 사진을 찍으며 글을 썼고, 프리랜서로 독립한 이후에는 필리핀 민다나오의 무슬림반군과 동티모르 독립전쟁 등을 취재했다. 사진 웹진 <이미지 프레스>와 사진 무크지 <여행하는 나무>를 발행했고, 진보신당 정책위원회 부의장과 문화예술위원장 등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레닌이 있는 풍경>, <파미르에서 윈난까지>, <변경지도> 등 사진과 르포르타주가 결합된('포토 르포트타주') 책들을 펴냈고, '이상한 숲 DMZ'와 '변경의 역사' 등의 전시회를 열었다. 임순례 감독은 그의 책 <변경지도> 추천사에서 "이상엽의 사진과 글이 귀한 것은 그가 기록자로서의 고단한 노동과 지성인으로서의 날카로운 사유의 책무를 늘 게을리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평했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3년 5월 05일, 금 10:1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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