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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 문화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러시아에서 살아남은 그, 독립운동가의 대부되다
[김성호의 독서만세 203] 문영숙 <독립운동가 최재형> 등

(서울) 김성호 기자 = 아는 거라곤 이름 석 자 뿐이었다. 누군가 내게 다가와 최재형 선생을 아느냐고 물으면, 나는 그 이름 석 자 말고는 다른 무엇도 떠올리지 못했을 테다. 선생이 독립운동가란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남들보다는 낫지 않느냐고, 그런 교만한 마음까지 일었을지 모른다. 안중근이며 홍범도며 근래 화제가 된 여러 독립운동가에 대한 글을 찾아서 읽으면서도 최재형 선생의 역할과 업적에 대해서는 따로 찾아볼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 이 책을 늦게라도 집은 것이 정말이지 다행한 일이다.

몇 달 전인가 짤막한 뉴스를 봤다. 최재형 선생과 아내 최 엘레나 페트로브나 부부가 국립현충원에 함께 묻혔다는 소식이었다. 정부의 무책임한 일처리, 묘지 멸실이며 그와 얽힌 이야기들을 보고서도 '그렇고 그런 일들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아닌가'하고 넘어가고 말았다. 그를 알았다면 달랐을 것이다. 사람의 감정 또한 제가 아는 것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앎이란 얼마나 중요한가.

친구가 내게 어느 독후감 대회를 추천해줬다. 그는 어떻게 알았는지 최재형이란 독립운동가와 그를 기리는 재단이 있고, 그곳에서 마침 이러이러한 행사가 있다고 전했다. 읽고 쓰며 공부하는 일을 즐기는 내가 놓칠 수는 없었다. 문영숙 작가가 낸 두 권의 책을 읽게 된 이유다.


▲ 책 표지 ⓒ 서울셀렉션

노비로 태어나 독립운동 대부 되다

하나는 소설 <독립운동가 최재형>이다. 노비로 태어나 처형의 위험을 무릅쓰고 온 가족과 함께 강을 건너 러시아로 터전을 옮긴 나이가 고작 열도 되지 않았다고 했다. 나랏법을 어겨가며 조국을 등진 백성들의 삶은 얼마나 고된 것이었을까. 누구도 살지 않는 북방의 동토를 일굴 수 있다는 사실마저도 그저 다행하게 여겼던 이들의 삶이란 또 얼마나 절망스런 것이었을까.

제 백성을 돌보지 못해 나라 밖으로 떠나게 할 만큼 허약했던 나라는 그로부터 수십 년을 더 버티지 못하고 일제에 무너진다.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러시아에서 살아남은 최재형 선생에게 제 뿌리를 생각하라는 말은 오늘을 사는 나로서는 민망하기까지 하다.

소설은 소년 최재형이 러시아의 신망 있는 사업가이자 한인 지도자, 나아가 독립운동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다. 가출하여 선한 러시아 선장 부부에게 거둬지고 상선 선원이 되어 넓은 세상과 만나는 모습은 읽는 내내 마치 어린 최재형이 된 것 같은 설렘을 안긴다. 모든 것이 새로움이고 배움이었을 나날이 그를 얼마나 큰 사람으로 성장시켰을 지가 선하게 그려진다. 바다에서 돌아온 최재형은 러시아 상사에서 근무하며 인맥과 사업수완을 길러나간다.

러시아어가 능통하고 세상물정을 아는 청년 최재형이 한인사회에서 걸맞는 쓰임을 얻는 건 당연한 일이다. 넉넉한 마음으로 제 뿌리를 잊지 않은 최재형은 러시아 사회의 인정과 한인들의 지지를 받아 오늘의 군수쯤인 도헌에 임명된다. 아관파천 뒤 러시아를 중요하게 여긴 한인들이 최재형을 찾으며 점차 정세에 눈을 뜨고, 나라가 위험에 처한 뒤부터는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선다. 그로부터 러시아 독립운동의 중심 격 인물이자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의 배후로 혁혁한 공을 세우기까지 한 것이다.

역시 문영숙 작가가 쓴 <잊혀진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은 소설의 바탕이 된 최재형 선생의 전기라고 해도 좋을 책이다. 소설 또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쓰였으나 흥미와 가독성을 위하여 몇몇 부분을 쳐내고 또 붙인 부분이 있는 게 사실이다. 예를 들어 최재형 선생의 죽음을 그저 총살이 아닌 도주 중 총격을 당해 사망한 것으로 그린다거나 그가 붙잡히는 장면에서도 생생한 묘사를 더하는 식이다. 또 최재형 선생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업으로 성공한 최봉준의 사이를 집안끼리 알고 지내는 동네 형동생 사이로 설정하고, 그로부터 이어진 애증의 감정을 덧입히는 대목 등도 소설의 맛을 더했다.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자금은 누가 대었을까

대신 최재형 선생의 삶에 집중하느라 그만큼 충실하게 다루지 못한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전기에선 보다 많은 분량으로 실어 당시 독립운동의 상황을 보다 넓은 시각에서 읽어낼 수 있도록 돕는다. 참고도서로 의지한 박환 교수의 <시베리아 한인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 등에서 발췌한 여러 사료들이 그 근거가 된다. 최재형 선생과 독립운동조직에 대한 러시아나 일본 측 보고서를 싣기도 하고, '해조신문'이며 '대동공보'에 실린 최재형 선생과 안중근 의사의 글을 옮겨 실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특히 이들의 육성이 그대로 묻어난 당시의 글을 옮겨놓은 대목은 당대 독립운동가의 말과 글을 직접 접할 일이 많지 않은 오늘의 독자에게 생생한 감동을 안긴다.

책을 읽으며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최재형이란 인물의 특수성이다. 책에는 대한제국에서 발급한 패를 가지고 연추를 찾은 이범윤과 그 부하들, 또 조선의 양반 출신 독립운동가들, 직접 총을 잡고 일본군과 맞선 홍범도 장군 등 출신과 행적이 다른 독립운동가가 여럿 등장한다. 이들 중 여럿은 우리가 역사 가운데 독립운동가의 이미지를 떠올릴 때면 쉽게 닿을 수 있는 모습이다. 유인석과 같은 유학자 출신 의병장과 그 제자들, 또 안중근이나 홍범도 같은 뚜렷한 업적이 있는 이들의 모습을 우리 역사가 깊이 있게 조명해왔기 때문이다.

반면 그 뒤에서 자금을 대고 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닦은 최재형 선생과 같은 이들에 대해선 충분한 지식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가 어떻게 낯선 땅에서 터전을 일구고, 또 어떻게 그와 같은 인맥과 수완을 갖출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나와 같은 독자의 관심이 닿지 않았다고 해도 좋겠다.

오늘의 한국이 독립운동가를 대하는 자세

나라를 잃고 조국의 강토를 벗어나 독립을 도모해야 하는 이들이 타국의 인정이며 지원을 받아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러시아와 미국, 중국 정도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한 주요한 무대였고, 급변하던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국제정세를 고려하면 이들 나라에서 한인들이 안정적이며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터전을 닦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사회가 이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면 한숨이 나올 밖에 없다. 최재형 선생의 국립현충원 묘소 멸실과 홍범도 장군 흉상철거 논란에서 보듯, 광복 이후 78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냉전종식이며 민주화가 이뤄진 이 땅에서 여적 반동적이며 수구적이고 소모적인 논란이 거듭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자세히 들여다면 저와 다른 이의 처지와 사정을 돌아보려 하지 않는 무신경함과 무지함, 편의주의와 이기주의가 짙게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모두는 최재형 선생과 같은 독립운동가의 정신에 반하는 것이다. 이들이 저의 안녕과 안전을 걸고 싸운 것은 조국과 민족과 이웃을 위하여 저 자신을 희생하는 데서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고 싸운 그들의 노력 뒤에 겨우 기틀을 마련한 이 나라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소모적 싸움이나 하고 있는 현실이 그저 참담할 뿐이다.

<잊혀진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은 최재형 선생의 선택을 당대의 시대적 상황 등과 맞물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 조선 대신 러시아 국적을 택한 것부터, 도헌이 되어 조선 이민자들에게 교육과 산업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과정, 총을 들고 국내로 돌입하는 것보다도 러시아 내 한인들의 힘을 키우는 데 주력한 시간, 러시아 내전 가운데 적위군의 편에 서고 단체를 결성하여 소비에트의 일원으로 역할을 하려 했던 대목 등에서 조선 이주민들의 지도자인 최재형 선생의 고민이 절절히 읽힌다.

특히 소비에트연방 성립 직전 볼셰비키 적군과 지방유지 및 친 황제 세력인 백군이 갈라져 싸운 국면에서의 선택은 재러 조선인의 운명을 바꿀 만큼 중요한 것이었을 테다. 근래 홍범도 장군 흉상철거와 관련한 논란에서 어떤 이들은 독립운동가가 소련 및 공산주의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점을 들어 그들의 업적 전체를 폄훼한다.

그러나 책이 적고 있듯 1904년 발틱함대를 대륙 반대편으로 보내어 일본과 싸웠던 러시아가 10년 뒤 1914년 1차 대전 발발 뒤엔 일본과 동맹국이 되어 재러 조선인을 탄압하고, 그 3년 뒤 내전에선 체제의 명운을 건 싸움이 이어졌던 것이다. 백위군이 일본과 동맹인 상황에서 점차 전황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볼셰비키 적위군을 러시아에 터 잡은 당대 독립운동가가 어떻게 외면할 수 있었을까. 급변하는 정세와 그에 따른 고민을 당시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는 데 이 책의 가치가 있다.

최재형 선생은 왜 잊혀졌는가

안타깝게도 최재형 선생이 오늘날 한국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 또한 이와 관련이 있다. 엄존해온 미소 냉전과 조국의 분단된 현실이 러시아며 소련에 근거를 두고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도록 막았던 것이다. 그러나 조국 분단의 비극을 정치적으로 활용해온 군부독재가 수십 년 전 막을 내렸고, 민주시민의 성숙해진 의식은 비로소 과거를 제대로 평가할 힘을 얻었다. 2021년 정부 차원에서 이뤄진 홍범도 장군의 유해송환과 현행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 8종의 충실한 평가 모두가 이 같은 흐름 아래 이뤄진 것이다.

이제는 최재형 선생의 차례다. 독립운동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뒤에 최재형 선생의 존재가 분명한 역할을 하였단 게 분명하다. 뿐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으로 지명될 만큼 당대의 저명한 독립운동가였고, 러시아 난로를 뜻하는 페치카가 별명이었을 만큼 재러 한인들에게 정신적, 물질적 지주가 되어준 그다. 적과 대면해 총을 겨누는 독립운동가 뒤엔 그들을 입히고 훈련시키고 물자를 대어주는 이의 역할이 지대하단 걸 모두가 안다. 그 모든 역할을 묵묵히 수행한 최재형 선생을 독립한 조국이 외면한 시간이 너무나도 길었다.

저자인 문영숙 작가의 말에 따르면 최재형 선생은 초등학교 도덕과 사회교과서에 이름이 언급될 뿐,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엔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자라나는 미래세대의 역사인식 가운데 최재형 선생이 한 자리를 얻지 못하는 이 같은 현실이 우리사회가 얼마나 왜곡되고 편협한 시각을 갖고 있는지를 알게 한다. 홍범도 장군 흉상철거 논란이며 최재형 선생 묘지멸실의 참담함 뒤에 역사를 바로 대하지 않는 우리의 실패가 자리하고 있는 게 아닌지 깊이 반성한다.

조지 오웰은 역작 <1984>를 통해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고 적었다. 우리 역사 가운데 마땅히 들었어야 할 위인들이 오랫동안 외면 받아온 현실은 우리가 현재를 챙기지 못함으로 과거와 미래까지 내팽개치고 있다는 걸 일깨운다. 최재형 선생과 독립운동가들의 수고로운 삶에 관심을 가지고 기리는 일이 왜 중요한지,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다. 최재형 선생을 바로 기억하는 일은 그 출발이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3년 12월 02일, 토 6:17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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