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도칼럼] 아들 김홍걸에게 교열 부탁받은 김대중 대통령이 쓴 '망명일기' '대통령 수칙'

(서울=오마이뉴스) 박도 기자

늙은 훈장의 느꺼운 일감

나는 30여 년 교사로 지내온 바, 수많은 제자를 가르쳐 왔다. 교사 초임 당시 숭실대학교 철학자 안병욱 교수로부터 가장 보람된 인생은 "산에 나무를 심는 일과 사람을 교육하는 일이다"는 말씀을 들은 바 있었다. 이즈음에야 그 말씀을 금언처럼 새록새록 새기고 있다.

1945년생인 나는 올해 꼼짝 없이 여든에 이르렀다. 나는 그동안 교단에서 수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김대중·이희호 대통령 부부의 아드님 김홍걸 전 의원도 그 제자들 가운데 한 명이다.

몇 해 전 그가 금강산 길 재개를 위한 남북 연대 모임에 초대하여 동행하였고 일본 사도 광산 취재 길에도 초청하여 두 곳의 현지인들에게 각별한 선비 문화의 아름다운 사제 모습의 진수를 은근슬쩍 보여준 적이 있었다. 올 연초에 그는 늙은 훈장의 일감으로 선친의 유품인 1970년대의 '망명일기' 일부를 보내면서 교열을 부탁했다.

감사한 마음으로 이를 정리하여 그 일부를 보내자, 지난 7일에는 '망명 일기' 나머지 부분과 대통령 국정일기 '수칙'도 보내, 요즘 늙은 훈장은 그 일감으로 보람 있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실 사람이 늙도록 건강하게 일하는 것처럼 즐거운 인생은 없다.

국정일기 중, 대통령 수칙 편을 살펴보다가 정말 혼자 보기가 아까워 이를 널리 공개하는 바다. 장차 이 땅에서 정치인의 길을 걷고자 하는 분이나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큰 야망을 품은 분들은 꼭 일독한 뒤, 공감된 부분은 가슴에 깊이 새겨 두시라. 그러면 본인뿐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의 정치 발전에도 크나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기에 그 원문을 다소 가다듬어 전하는 바다.
사랑과 관용 그러나 법과 질서는 엄수해야

수칙(守則

1. 사랑과 관용(寬容), 그러나 법과 질서는 엄수해야.
2. 인사(人事) 정책 성공의 길, 아첨한 자와 무능한 자의 배제.
3. 규칙적인 생활, 적당한 운동, 충분한 휴식으로 건강 유지.
4, 현안(懸案 이전부터 의논하여 오면서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문제나 의안) 파악 충분히, 관련 정보 숙지해야.
5. 대통령부터 국법 준수의 모범을 보여야.
6. 불행한 일도 감수(甘受)해야. 다만 최선을 다하도록.
7. 국민들의 애국심과 양심(良心)을 믿어야. 이해가 안 될 때는 설명 방식을 재고(再考)해야.
8. 국회와 야당 비판에 경청(傾聽), 그러나 정부 짓밟는 것 용서하지 말아야.
9. 청와대 이외의 일반 시민들과의 접촉에 힘써야.
10. 언론의 보도를 중시(重視)하되 부당(不當)한 비판 앞에 소신 바꾸지 말아야
11. 정신적인 건강과 건전한 판단력을 견지(堅持)해야.
12. 양서(良書) 매일 읽고 명상으로 사상과 정사(政事) 심화해야
13. 21세기 대비(對備) 철저 및 나라와 국민의 미래 명심해야
14. 적극적인 사고와 성공의 상(像) 마음에 새겨야
15. 나는 할 수 있다. 하느님과 같이 계시다.

이 수칙에는 대통령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 자세와 경천 애인(敬天愛人)하는 곧 국민을 공경하고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넉넉한 마음이 물씬 배어 있다. 그분은 일생 동안 끊임없이 공부했다. 그분에게 교도소는 곧 인생 대학이었다. 숱한 시련과 실패 속에서도 내일을 준비했던 '준비된 대통령'이었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이 된 이후 외환위기를 거뜬히 넘길 수 있었고, 용공 분자· 빨갱이 등 갖은 욕을 먹으면서도 당신의 평생 소원인 남북 화해의 초석을 놓는 남북 정상회담의 금자탑을 길이 우리 겨레에게 남겼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이 남긴 이 '수칙'들을 읽으면서 윤석열 현 대통령이 좀 더 일찍 선임 대통령의 수칙을 공경, 마음 속 깊이 간직하여 실천하였더라면 오늘의 불행을 피해 갔으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면서 이 나라 다음 세대 지도자들을 위해 아직도 늦지 않았다는 신념으로, 이 글을 남기는 게 한 교육자의 소명 같기에 이를 널리 전하는 바이다.

이밖에 김대중 비망록인 1970년대 '망명 일기'를 교열 하면서 크게 감동한 몇 대목을 남긴다.

나는 조국과 나의 사랑하는 동포를 위해서 싸우다 쓰러진 패자(敗者)가 될지언정 독재나 불의 속에 영화를 누리는 승자(勝者)의 길은 택하지 않을 것이다. (1972. 10. 17.)

주여! 우리 조국과 국민을 보살피소서. 그리고 저에게 조국을 위해 일할 용기와 힘을 주소서. (1972. 10. 22. 기도문)

나의 신변을 주위에서 걱정을 하나 무슨 도리가 있겠는가. 죽고 사는 것을 천주님에게 맡기고 신념대로 나갈 뿐이다. (1972. 10. 27.)

세상은 결코 인간의 지혜로는 측량할 수 없다. 내일은 결코 오늘이 아니다. 변화가 있기 마련이다. 그 변화를 참고 기다리며 꾸준히 노력을 하자! (1972. 10. 29.)

나는 1950년 6.25 전쟁 때, 그리고 작년(1971년) 5월 24일 자동차 사고로 죽었던 몸이다. 그날 이후 20여 년이나 더 살았으며, 그동안 많은 일도 했다. 이제 앞으로 어떤 고초(苦楚)와 변(?)을 당하더라도 살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동안의 생명을 유지케 주신 데 대해 (하느님에게) 감사하고 떳떳이 살아나가자! (1972. 11. 20.)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