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강 등 작가 성명 기획한 서효인 시인 "말장난 하는 엘리트, 지성인 맞나"

(서울=오마아뉴스) 김성욱 기자 = 지난 25일,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을 비롯한 작가 414명이 한 줄씩 성명을 써 발표했다. '피소추인 윤석열의 파면을 촉구하는 작가 한 줄 성명'. 헌법재판소에 조속한 윤 대통령 파면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한강 작가 외에도 김애란•김연수•김초엽•나희덕•박상영•은희경•장강명•정보라 등 내로라하는 유명 작가들이 대거 참여해 화제가 됐다.

"훼손되지 말아야 할 생명, 자유, 평화의 가치를 믿습니다. 파면은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일입니다." - 한강 소설가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이것을 헌법의 이름으로 탄핵하기가 이토록 오래 걸릴 일인가." - 김경욱 소설가
"나는 그날 총구가 누구를 향해 있는지 봤다." - 백민석 소설가

길어지는 헌재의 무응답에 '일상을 돌려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독자들은 이번 성명이 '가뭄에 단비 같다', '불안했는데 위로받았다'며 반가워했다. '작가들의 백일장'이란 감탄과 함께 SNS에는 저마다 마음에 드는 '한 줄 성명' 캡처가 줄을 이었다.

414명 한 줄 성명은 누구 아이디어였을까? 시인 서효인(44). 서 시인은 "주변 시인들과 답답한 마음을 나누다 '우리는 글 쓰는 사람들이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얘기가 나왔다"고 했다. 그는 12.3 비상계엄과 헌재의 선고 지연을 "보험금 안 나오는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뒤따르는 차에 꽝꽝꽝 부딪혀 2차 3차 사고까지 계속 나고 있는 꼴"이라고 비유했다.

2006년 <시인세계>로 등단한 그는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여수> <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 <거기에는 없다> 등을 썼고 김수영 문학상•대산문학상•천상병시인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서 시인을 27일 서울 마포구 안온북스 사무실에서 만났다.

"한강 작가의 한 줄 성명처럼… 파면은 대결 아닌 보편적 가치"

- 한 줄 성명이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작가들이 글을 보내줄 줄은 몰랐어요. 이렇게 화제가 될 줄도 몰랐고요. 지난주 금요일(21일)에 사석에서 만난 오은 시인, 유희경 시인과 대화하다 그저 즉흥적으로 같이 시작한 거거든요. '해볼까?' '오버인가?' '오버 아닌 것 같은데?' 하면서. 요즘은 구글 폼이 잘 돼 있으니 그렇게 힘들 것 같지도 않았고요. 일요일로 마감을 정하고 겨우 사흘 모았는데 414명이나 왔어요.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숙고할 것 없이 동감하고 있다는 거겠죠."

- '한 줄 성명'이란 형식도 통상의 성명들과 달랐습니다.

"문학계에 한 줄 성명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에요. 작가들이니까, 직접 글을 쓰자는 거니까. 북 디자이너 이지선씨가 도움을 주셔서 한 페이지씩 성명을 제작한 게 시각적으로 좋았던 것 같아요. 인스타그램 같은 SNS에 올리기 딱 적절한 크기로 맞춰주셔서 바이럴이 잘 된 것 같습니다."

- 414명의 성명 중 특히 기억에 남는 게 있나요?

"일단 한강 작가님의 '보편적 가치'라는 말이요. 이게 어쩌다 보니 좌우 대립구도처럼 됐잖아요.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해 온 것 같더라고요. 자연스럽게 이겨야 된다, 승리와 패배의 관점으로 보게 된 것 같고. 언론도 그러고 있죠. 그런데 한강 작가님의 문장을 읽으면서 '아, 맞다, 이건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일이었지' 하는 생각을 저도 다시금 하게 됐어요.

아무래도 작가들이니까 한 줄을 달라고 해도 작가의 정체성을 투여해서 보낸 문장들이 많을 텐데, 이번에 어떤 분들은 단말마처럼 '윤석열을 파면하라'고 보냈더라고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그걸 보면서 '아, 그 어떤 레토릭보다 지금은 이 말이 전부일 수도 있겠다'하는 생각도 같이 들었어요."

"계엄 이후 글도 안 써지고, 출판계도 어려워… 답답해서 집회 나가"

"제발 빠른 파면을 촉구합니다. 진심 스트레스 받아서 이 한 줄도 못 쓰겠어요. 빨리 파면 좀!" - 김초엽 소설가
"탄핵 인용 외에 마감은 없다!" - 고운기 시인
"이 마당에 책이 뭐람, 작업이 뭐람, 예술이 뭐람!" - 이수지 그림책작가

- 한 줄 성명 중 헌재 선고에 신경이 쓰여 일이 안 된다는 작가들이 여럿 눈에 띄었습니다.

"지금 시민들이 다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고 있잖아요. 시인들도 똑같은 시민이에요. 작가와 독자는 쌍둥이죠. 저도 글쓰기가 좀 힘들어요. 자영업자분들 장사 안 된다고 하시는데 그분들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저희도 굉장히 애로가 있죠. 뉴스가 더 갈급하고, 머리에 먼저 들어오고, 집중이 잘 안되고요. 제가 안온북스라는 출판사도 운영하고 있는데, 실제 12.3 비상계엄 이후 도서 판매량이 현저히 줄었어요. 출판계 전체가 어려워졌죠."

- 12.3 비상계엄 당일에는 뭘 하고 계셨나요.

"집에서 축구 보면서 쉬고 있는데 TV에 속보가 나오는 거예요. 선포되고 이미 좀 지난 시점이었는데 상황 인식이 잘 안됐어요. 약간 꿈 꾸듯이. 나중에는 점점 두려움이 오더라고요. 의아함에서 공포감으로 바뀌는 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죠. 특히 포고령 중에 '출판을 금한다'가 턱 걸렸어요. 선배 세대들이 겪은 것처럼 혹시 폐간을 당하는 건 아닐지, 어디 갑자기 끌려가거나, 검열을 당해 책이나 신문이 검은색으로 칠해져 나가는 건 아닌지… 한편으론 그게 지금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이 있단 말인가? 싶기도 했고."

- 이번 성명을 주도하시면서는 두려움이나 부담을 느끼진 않으셨나요?

"부담은 됐죠. 이렇게 인터뷰하는 것도 조금 부담되긴 해요. 그렇다고 대단한 사명감이나 용기까지 갖고 한 일은 아닌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기는 너무 부끄럽고, 그냥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정도였죠. 저에게 무리가 되는 선까지, 제 몸을 완전히 오체투지하자, 이렇게까지 한 건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 작가님의 한 줄 성명은 "앞서 죽은 자들의 명예와 사랑을 더럽히지 말라. 내란 수괴 윤석열을 즉각 파면하고 재구속하라"였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떠오르는 문장인데요.

"제가 5•18을 경험한 세대는 아니지만 고향이 광주이기도 하고, 그래서 항상 그 가사가 사안사안마다, 변곡점마다 좀 생각나는 편이에요. 제가 이번 계엄 사태 이후 가장 분개했을 때가 광주에서 열린 전한길씨 집회거든요. 그 사람들이 기어이 금남로 대로까지 와서 집회를 하는 걸 보고 약간 힘들 정도로 화가 나더라고요. 그날 일이 있어서 광주에 가진 못 했는데…"

"나는 지역 언론사 사옥 옥상에까지 단숨에 뛰어 올라가 관공서를 노려본다. 해가 진다. 혀를 비쭉 내밀고 골린다. 너는 내가 결국 개라는 걸 몰랐지. 멍멍 몰랐지. 할짝할짝 몰랐지. 혀를 깨물었다. 사람 몇이 개처럼 죽고도, 아픈 건 잠깐이었다. - 서효인 시 '금남로' 중, 시집 <여수>
"경계하던 구역을 버리고 집으로 숨어 들어갔지. 어머니가 울고 있더군. 그리고 곧 총성이 들렸어. 군인들이었어. 군인들이… 도청으로… 사람을 죽이러… 몰려가는 소리가." - 서효인 책 <좋음과 싫음 사이>
"이십 대 끝자락에 나는 광주가 싫어졌고 그즈음에는 충장로를 걷는 일도 없었다는 말이야. 나는 벗어나고 싶었고 광주의 골목과 대로와 상처와 역사가 나를 옥죄는 것 같았고, 또 어쩌면 그냥 이 빌어먹을 사투리가 싫어서, 떠났는데 말이야. (중략) 나에게 광주란 무엇인지. 뻔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지." - 서효인 책 <좋음과 싫음 사이>

- 광주 출신이라는 점으로 인해 계엄 이후 상황을 더 크게 받아들인 면도 있었나요?

"그건 아니에요. 이건 어떤 임계점을 넘은 거라고 봐요. 임계점을 넘으면 사람들이 다 똑같아지잖아요. 이번에 성명 낸 것도 그렇고요. 가령 남태령에 간 청년들, 여성들, 농민들 혹은 더 즉자적으로 본인의 생존에 연결해서 사태를 받아들이신 분들도 많이 있었죠."

- 집회도 나가십니까.

"두 번 정도 빼고 주말마다 나갔던 것 같아요. 다 제 마음 편하자고 나가는 거죠(웃음). 일단 집에 있으면 속이 답답하니까 나가면 좀 낫고요. 해소되는 부분이 있죠. 근데 다시 집에 돌아가면 또 답답해지고…

광장에 나가보면 정말 다양한 직업, 세대, 지역의 사람들이 모이더라고요. 저는 책 만드는 사람이니까, 이렇게 펼쳐져 있는 사람들의 기록물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저희 출판사에서 최근에 책도 냈어요. <다시 만날 세계에서>라고. 여러 작가들이 참여했는데 특히 김후주 작가님은 이번에 집회 현장에서 처음 만난 분이에요. 작가님이 집회 발언대에서 남태령에 대해 말씀하시는 걸 듣고 곧바로 필자로 모셔야겠다 싶어서 제가 인사를 드렸죠."

"지성이 거세된 엘리트들, 너무 많아"

"일거에 척결하겠다는 말, 그건 도무지 한국어가 아니고 민주주의의 언어도 아니다." - 김남일 소설가, 한 줄 성명 중

- 직업적으로 언어를 다루시는 분인데, 계엄 이후 우리의 언어가 더 심각하게 오염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어요. 자신의 책임을 떠넘기겠다고 '의원'이니 '요원'이니 '인원'이니 하는 것도 그렇고, 법을 해석하는 권력을 가진 엘리트들이 대통령의 구속기간만은 '날'이 아닌 '시간'을 기준으로 하겠다 한 것도 그렇고요. 시민들은 공식석상에 선 권력자로부터 '처단한다', '일거에 척결한다' 같은 말을 들어야 하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보시나요.

"어릴 때 왜 친구들끼리 말싸움하다 손이 올라가는 순간이 있잖아요. 그게 언제냐면, 말꼬투리 잡고 말장난 할 때예요(웃음). 우리는 지금 그 손을 안 올리기 위해 너무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법조인이 아니라 잘 모르지만, 법이라는 게 참 우스꽝스럽구나, 하는 생각을 이번에 새삼 했어요. 사실 법의 잘못은 아닐 것 같은데. 법조인들, 그러니까 엘리트들이 우스꽝스러운 거겠죠. 지금 법조 엘리트들은 꼬투리 잡아서 성공했다고 굉장히 좋아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요.

이번에도 확실하게 느낀 건 '엘리트'라고 '지성인'은 아니라는 거예요. 시험에 합격해서 엘리트가 됐을 뿐이라는 거죠. 지성이 뭘까요? 단순히 공부 잘한 걸 넘어서, 결국은 타인을 헤아리는 능력, 타인의 상처, 역사, 공동체의 안위를 입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이 남을 생각하고 타인에게 다정하고 배려하는 것, 어려움에 닥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 적어도 상대에게 피해는 안 끼치는 것… 이런 건 본능적이어서가 아니라 지성적인 존재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보거든요. 그런 지성이 거세된 엘리트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해요. 똑똑한 척하지만 실은 아닌… 반지성주의적 엘리트라고 할까요.

지금 헌법재판소의 재판관들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예를 들면 헌재 앞에서 장사하시는 분들만 생각해도 이렇게 오래 끌진 못할 것 같아요. 뉴스를 보면 조문을 더 잘 쓰려고, 혹은 이견이 있어서 오래 걸린다고들 하는 것 같은데, 그게 오늘 이 공동체의 타인들과 얼마나 동떨어진 생각이에요. 저는 요즘 사람들이 '이러다 기각되는 거 아니야?'라는 일말의 의심을 하게 만든 것 자체가 엄청난 사회적 손상이라고 생각해요. 정신적 외상이고요. 마음 어딘가 커터 칼에 베인 느낌이에요. 그 상처를 좀 봤으면 좋겠어요. 계엄이라는 교통사고를 이미 한번 크게 당해서 병원 다니고 치료받아야 할 사람들인데, 헌재 판결까지 안 나오니까 병원도 못 가고 계속 상처만 깊어지는 거죠. 2차, 3차 사고가 뒤에서 꽝꽝 나고 있는 상태 같은. 만약 이조차 살피지 못한다면 헌법재판관들도 반지성적 엘리트일 뿐이라고 봐요."

"시와 문학은 다르다. 세상을 구원할 힘이 그들에게는 없다." - 서효인 산문집 <잘 왔어 우리 딸>

- 그래서 그런지 이번 작가 한 줄 성명이 위로나 치료가 됐다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책의 위기'라고들 하지만, 이번 성명으로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을 보여준 것 아닐까요.

"시인이 언어로서 사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는 없어요. 예컨대 거리에서 나오는 혐오나 테러 협박이나 가짜뉴스들은, 언어를 아름답게 하기 위한 캠페인 차원으로 해결할 수는 없죠. 권력자들의 언어에 대해서도 그렇고요. 그건 그걸 처리할 수 있는 제도나 법의 테두리, 처벌의 영역이 따로 있다고 봐요. 시인의 언어는 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뿐이고, 그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입니다.

이번 성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헌법재판관들이 작가들의 성명을 읽는다고 해서 판단을 바꿀 거라고 보진 않아요. 좀 더 긴 시간을 두고, 우리는 우리의 노력을 하는 것뿐이죠. 제 생각에 문학의 역할은, 일단은 사람들이 재미있게 책을 읽게 하는 거예요. 아무리 봐도 그게 1번이에요. 자꾸 그걸 넘어가서 생각하면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책장을 넘기면서 좋은 시간을 보낸다면 그게 첫 번째로 중요한 문학의 역할을 한 거죠.

그런데 독자들이 책장을 즐겁게 넘기면서 감동하고,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으려면 그 책 내용이 좋아야 되겠고, 내용이 좋다는 건 결국 둘 중 하나입니다. 자신을 곰곰이 생각해 봤거나, 아니면 저 사람은 그랬겠구나 하고 헤아려보는 것. 문학을 통해서든 아니든 이 과정을 잘 겪은 사람, 그러니까 나를 돌아보고 타인을 살펴본 사람이 저는 지성인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사람들이 이번 비상계엄 사태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릴지는 사실 자명하죠. 헌법재판관들도 결국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서, 그러니까 자신을 들여봐야 할 것이고, 사회의 최저선인 헌법에 비추어 타인을 살펴보는 거겠죠. 문학적 방식은 그 이후에, 하지만 시간을 두고 자연스럽게 진행될 거라고 봐요."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