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악산 일기] 제 245화 책 <남정현의 삶과 문학>을 읽으면서

(서울) 박도 기자 = 흔히들, "글은 그 사람이다" 하여, 글을 보면 그 사람을 인다고 한다. 또한 세간의 평도 얼추 그 사람을 짐작케 마련이다. 내가 만난 수많은 사람 가운데 내 선입관을 완전히 바꿔 놓은 이는 딱 두 분이시다.

그 첫 분은 지난 2025년 7월 10일에 작고 하신 백범 암살범 안두희를 민족 정기를 위해 자연사 시켜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당신이 손수 만든 '정의봉'이란 몽둥이로 내리쳐서 저 세상으로 보낸 의인 박기서 부천 시내 버스 기사이시다.

나는 그분을 2005년 6월 백범 기일 56주기 직전 서울 효창동 백범 묘소 참배 후, 백범기념관 자료실에서 만나 대담을 나눈 바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그분은 버리지(벌레) 한 마리 잡아 죽이지 못할 만큼 마음이 여리고. 비단 결 같이 고우신 분이셨다.

그리고 그 두 번째 분은 <분지>(糞地)의 작가 남정현 선생이시다. 작가 '남정현' 하면, <분지>를 떠올릴 만큼, 그 작품은 내가 대학에 입학을 했던 1965년 그해 여름, 필화 사건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해 <현대문학> 3월 호에 실린 <분지>를 용공 작품이라는 구실로, 당시 중앙정보부는 작가 남정현 선생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 열띤 법정 공방을 벌인 초미의 관심 사건이었다.

나는 그 무렵 이 작품을 읽고 작가 '남정현'이라는 인물에 무척 경외심을 가졌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기발한 착상과 현실을 뛰어넘는 신랄한 풍자로 억눌린 사람의 한을 대변하는 그 용기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활빈당 수령 홍길동의 10대 손인 홍만수는 어머니와 누이 동생 분이와 함께 해방을 맞지만 독립 투사인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 날 어머니는 미군한테 성폭행을 당하여 그 충격으로 미쳐 죽는다. 그 뒤, 누이마저도 미군 스피드 상사와 동거한다. 누이는 밤마다 스피드 상사로부터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폭언과 학대에 시달린다.

만수는 스피드 상사의 부인이 한국을 찾아왔을 때, 그를 유인하여 향미산으로 데리고 가서 겁탈 한다. 이 사실을 안 미국 펜타곤 당국은 정예사단 병력과 미사일을 동원하여 향미산을 폭파하겠다고 한다. 만수는 자기 출신구 국회의원을 찾아가서 구원을 요청하나 거절 당한다. 그러나 홍길동 정신을 이어받은 만수는 조금도 겁내지 않는다. 오히려 홍길동의 기적을 통쾌하게 재연 시켜 저들의 심령을 뿌리 째 흔들어 놓을 생각을 한다. 폭파 10초 전, 만수는 태극 무늬로 아롱진 러닝셔츠를 찢어 만든 깃발을 스피드 상사의 부인 배꼽 위에 꽂을 결심을 한다.

나는 이 작품을 읽고는 마치 고대 소설 <임진록>이나 <박씨전>을 읽는 듯했다. 아무튼 나는 그 작품으로 남정현 작가를 몹시 날카롭고 예리한, 무서운 분으로 여기며 지냈다.

첫 만남 - 심성이 무척 곱고 여린 분

2003년 설날을 앞두고 당시 민족문학 작가회의에서 충남 공주교도소에 수감 중인 황석영 작가에게 면회 가는 버스를 탔다. 30여 분이 전세 버스를 타고 가는데, 마침 나는 남정현 선생 바로 옆자리에 앉게 됐다.

그날 공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와 선생은 눈발이 흩날리는 썰렁한 차창 밖을 바라보면서 분지 필화 사건 뒷이야기 등,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그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수록 내 선입관과는 달리 그분은 새색시처럼 심성이 무척 곱고 여린 분이었다. 체구도 자그만 하시고, 인상도 여느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음씨 좋은 초로의 예사 할아버지였다.

여러 사람이 먼 길을 달려갔으나 그날 공주교도소 측에서는 황석영씨의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더욱이 집단 면회는 안 된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다녀간 표시라도 남길 양으로, 그날 버스에 탄 회원들은 각자 100원 씩(1일 한도액 때문) 추렴 하여, 영치금을 맡기고 떠나왔다.

서울로 돌아오자 이미 어두웠다. 우리는 강남에서 내려 압구정 역에서 3호선 지하철을 탔다. 선생은 댁이 쌍문동이라면서 충무로에서 4호선을 갈아타고자 내리는데 나는 선생의 소매를 붙잡았다. 우리는 대한극장 앞 한 한식 집에서 따끈한 정종으로 건배하면서 미리 새해 인사를 나눈 뒤 떡만둣국을 맛있게 먹고 헤어졌다.

그 며칠 후, 나는 선생의 쌍문 동 집으로 초대를 받아 쪽 마루에서 햇볕을 쬐며 다시 만난 인연을 다독였다. 따님이 나의 대학 같은 학과 후배가 된다면서 선생은 나를 마치 혈육처럼 여긴 듯 무척 다사롭게 대했다.

그 세 번째 만남은 2005년 7월, 6?15 공동 실천을 위한 남북 작가 대회에 동행케 됐다. 공교롭게도 선생과 나는 같은 조로 편성, 내내 함께 이동케 됐다. 북의 안내원이 검은 치마에 흰 저고리를 단정히 입은 모습을 보고, 선생은 나에게 '조선의 꾸미지 않는 천연 그대로 미인의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하면서 그 아름다움을 매우 극찬했다.

세 번째 만남 - '조국 통일 만세'

그 대회 사흘 째인 7월 23일 새벽에는 백두산 장군봉에서 남북 및 해외 동포 문인들이 통일 맞이 행사를 하는데, 선생은 그 무렵 몸이 매우 불편한 탓으로, 그 행사에 참석치 못했다. 나는 거기까지 가셔서 차 안에서만 머무는 선생이 안타까워 장군봉 표지석까지 부축을 했다. 그러자 당신은 대단히 고마워하면서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조국 통일 만세'를 부르짖으셨다.

서울로 돌아온 뒤, 내가 대회 내도록 촬영한 숱한 사진들을 모두 뽑아 내 카메라 앵글 속의 담긴 참가 회원들에게 나눠주려고 일일이 주소를 묻자 선생은 굳이 만나자고 했다. 그리하여 광화문 교보문고 옆 한 찻집에서 만났다.

내가 방문 기간 동안 선생의 모습을 담은 사진 봉투(약 10 여 장)를 건네자 선생은 가방에서 <남정현 대표소설선집>을 꺼내 속표지에 '2005년 여름, 박도 선생께 남정현 드림'이라고 서명을 한 뒤, 매우 쑥스럽게 그 책을 건넸다. 아마도 사진 값 대신 주시는 것 같았다. 지금 회고해 보니, 그날이 선생과 이승에서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나는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분의 해맑은 얼굴과 다사한 눈빛이 나를 감싸면서 혈육의 정, 못지않은 사랑을 듬뿍 주시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선생의 그림자도 밟을 수 없는, 세속에 찌든 소인배일 뿐이다.

이 책 <남정현의 삶과 문학>의 두터운 책장을 한 장 한 장 끝까지 넘기면서 글쓴이의 선생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과 함께, 자구마다 담긴 깊은 사랑에 나도 이 세상을 떠난 후, 이와 같은 후배나 제자를 만날 수 있을까 몹시 부러웠다. 이 책 '남정현의 삶과 문학'은 남정현 선생의 생애와 작품에 관심이 많은 분에게는 필독서가 되리라 의심치 않는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