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레드 신드롬' 태워버린 월드컵

지난 한달여 동안 우리 모두는 무한히 들뜨고 흥분되고 황홀한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국내는 물론이고 국외에 거주하는 한국민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삼삼오오 모여서 모두가 밤을 지새우고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됐던 일들이 몇단계를 뛰어넘어 이루어 지며 우리 모두의 존재까지를 덮쳐버린 '신비체험' 같은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말할 수 없는 기쁨에 괴성을 질러댔고, 두손들고 길길이 뛰고 덩실덩실 춤을 추어 댔습니다.

이 '감격시대' 에 88올림픽 때그랬던 것처럼 소매치기도 밤손님도 일손 놓고 '필승 코리아' 를 외쳐 댔습니다. 어설펐지만 우리의 천덕꾸러기 정치인들도 경기장 안팎을 어슬렁거렸습니다. 목사도 승려도 필승을 위한 기도회와 법회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언론에서 길거리에 2백만명 나온다하면 2백만명이 나왔고, 7백만명이 모인다 하면 7백만명이 모였습니다.

'쓰레기 안 주으면 벌금낸다' 는 법률이 없었는데도 '국민도덕' 갓 배운 초등학교 1학년생처럼 경기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가 쓰레기를 주어 들었고, 응원 또한 집단체조 하는 것 만큼이나 질서 정연하고 조직적이었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신기해 했고 외국 언론도 무척 신기해 했습니다. 경기 외적인 면에서도 우리는 가히 신비를 체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크게 의식하지 못한 신비체험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집단적인 '빨간색 신비체험' 이라는 것입니다.

'빨간색 신비체험'

이번 월드컵 기간 동안 "왜 하필이면 '붉은 악마' 냐" 는 샐쭉거림이 자주 들려 왔습니다. '악마 '라는 보통명사가 주는 기분 나쁘고 부정적인 이미지에 '붉은' 이라는 형용사까지 붙었으니, 특정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당초부터 호감을 가질 수 있는 이름은 아니었지요.

몇년 전 어느 국제대회에 우리의 젊은이들이 빨간색 유니폼을 입고 악바리처럼 싸운 것을 놓고 현지 언론이 '붉은 악마' 로 지칭했을 때도 썩 내키지 않아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더구나 66년월드컵 8강전에서 이탈리아를 꺾는 파란을 일으킨 북한팀을 '붉은 모기떼' 로 지칭했었는데 이번에는 온통 남쪽 국민이 '붉은 악마' 가 되었으니.

빨간색 이야기중 실소를 금치 못할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70년대초 빈민운동을 했던 어떤 목사님의 빨간색에 얽힌 이야기지요. 그 목사님은 주민 수백명과 '생존권 보장하라' 는 문구의 플랑켓을 들고 데모를 벌이다 체포 되었는데, 걸고 들어갈 '꺼리' 를 찾지 못한 취조 검사 왈 "빨간색으로 글씨를 쓴 것으로 보아 빨갱이의 사주를 받은 것 아니냐" 며 몰아 부치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 목사님 얘기가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빨간색은 '재수 없는' 색깔이었습니다. 무슨 규탄대회를 한다며 머리에는 붉은 글씨로 쓰여진 띠를 두르고 새끼손가락을 잘라 '떼려잡자 000' 을 외치는 장면들에서 빨간색은 흔히 보여졌습니다. 북쪽을 소개하는 사진이나 화면에서 나타난 선명한 빨간색은 소싯적 보았던 나무 상여 맨 앞의 빨간색 사람(귀신?) 조각 만큼이나 무서운 색깔이었습니다.

생존권 보장을 외치는 노동운동 현장이나 최루탄 가스가 흩날리던 민주화 투쟁의 현장의 뒷 배경으로 길게 걸어 내린 플랭카드와 크고 작은 격문에서도 빨간색은 간단없이 보여졌습니다. 80년 5월 광주의 핏빛 색깔과 '탁치니 억하고' 고꾸라진 박종철·강경대·이한열들의 노상 장례식에 들려진 만사에 쓰여진 글씨 색깔도 빨간색이었습니다. 결단코 빨간색은 우리 모두에게 혼란과 불온을 상징하는 색깔이었습니다.

그리고 빨간 색깔에 덧씌워진 이러한 부정적인 이미지와 함께 의식의 색맹 현상이 우리의 사회를 뒤덮어 왔던 것입니다. 50년 가까이 정치나 경제 영역은 물론 한 껏 자유로는 사고를 기반으로 해야 하는학문·예술·종교 영역에서 조차 '빨갛다' 는 색조 판정이 한번 내려지고 나면 그것은 영원히 빨간색이지 그 어떤 색깔도 아닌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Be the Red'의 해학

그런데 우리 모두는 이번에 빨간색을 쓰고 입고 차고 두르고 팔짝 팔짝 뛰었습니다. 2년전 6월15일 DJ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북한 아줌마·어린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더구나 월드컵 기간이 아니었다면 'Be the Red!'라는 문구는 'Red' 앞에 정관사가 붙여졌으므로 정확하게 '빨갱이가 되라' 는 말로 번역될 수 밖에 없는 그런 불온 티셔츠를 입고 말입니다.

상황의 논리가 무시된 채 '불온' 문구는 항상 불온 문구일수 밖에 없는 남쪽땅에서 모두가 빨간색으로 쓰여진 'Be the Red' 를 입었다는 사실! 국가보안법 제7조3항, 찬양·고무·동조죄에 선전·선동 그리고 불고지죄...땅 땅!

저는 이번 월드컵에서 보여진 '레드 소동' 을 북쪽 사람들이 보고 다소간 씁쓸해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빨간색은 더이상 북쪽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 '빨갱이가 되라' 는 문구조차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가볍게' 다루어 질 수 있다는 것! 북녘 동포여러분, 아이러니에 희극적이기까지 한 '레드 소동' 에 얼마나 김이 빠지셨습니까?

아니, 김용갑·조갑제·박홍·조선일보 김대중님들, 얼마나 기가 막히셨습니까? 님들은 심리학자들의 분석이 아니더라도, 문화인류학자들의 연구결과가 아니더라도, 종종 상징(Symbol)이 실재(Reality)가 될 수도 있다는 산 경험 앞에 얼마나 가슴이 철렁하셨습니까? 건성건성 '햇볕' 을 노래하고 '포용' 을 읖조리더니 이제는 '북쪽이 연평도에서 도발했다 '는데도 '오- 피스(peace) 코리아' 를 외쳐대다니!

이번 레드 신드롬은 우리 사회의 자신감과 개방성에 대한 표식임이 분명하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감과 개방성이 쌓이게 되면 붉은 색이 섞인 것처럼 보인다 해서 민족주의자를 빨갱이로, 빨치산을 객관적으로 다뤘다 해서 한국'현대문학의 최고봉' 을 불온서적으로, 항일 사적지 방명록에 서명한 일을 '이적행위' 로 몰아 버리는 등의 피해망상적이고 신경질적인 분위기는 우리 사회에서 누그러 들지 않을까요?

월드컵으로부터 경험한 집단적인 신비체험이 우리 사회 구석 구석에 겹겹이 쌓인 분단 찌꺼기를 태워버리는 폭발적인 에너지로 치환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하여, 다음에는 역사에 길이 기록될 최상의 신비체험을 하게 될 통일의 그 날을 기대해 봅니다. 오-피스 코리아! / 김명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