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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시간: (EST) 2022년 11월 27일, 일 2:52 pm
[칼럼/기고/에세이] 기고
 
[내 젊음을 바친 군대 5] "귀관들! 손에 든 소총이 어느나라 것인가"
민족 의식에 목말랐던 생도 시절

세월은 쏴놓은 화살처럼 멈춤 없이 흘러 어느덧 4학년이 되었다. 당시 생도들은 2개 대대로 편성돼 있었으며, 생도 훈육은 전적으로 생도 자치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난 전반기 6개월 동안 후배 훈육을 책임지는 제1차 제1대대장 생도직에 임명됐다. 1차 근무생도는 우리보다 3년 후배인 21기 신입생들의 기초군사 훈련을 이끌어야 하는 책임을 맡았다. 매우 중요한 자리였다.

내가 신입생 기초군사 훈련을 받을 때 가장 아쉬웠던 건 '사관생도에게 어떤 비전과 꿈을 심고 의식을 불어넣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확고한 철학과 신념이 교관들에게서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능적으로 전투만 잘 하는 싸움꾼을 만드는 데 집중하는 교육이었던 것을 난 못내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이 부분에 역점을 두어 후배들의 가슴에 꿈을 심어주려 했다.


▲ 대대장 생도 시절.

생도들은 누구보다 투철한 민족의식으로 무장하고, 민족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뜨겁게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이것이 생도 훈육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여야 함에도, 놀랍게도 당시 우리 사관학교엔 민족의식 함양을 위한 어떤 비전도, 개념도 없었다.

민간인에서 처음 군인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각인된 교육은 군대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중요하다. 그런데 이 절호의 시기에 민족의식을 불어넣기 위한 교육이 없었다. 내가 후배들을 지도해야 할 상급생이자 근무생도가 되면서 가장 크게 고민한 게 바로 이 대목이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존재한다는 우리 사관생도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우리의 존재 이유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이 모든 물음에서 '민족'을 떠나서는 답이 나올 수 없었다. 그러나 이처럼 중요한 '민족'이라는 주제가 당시 훈육 과정에서는 빠져 있었다. 생도 정신교육과 훈육의 핵심이 되어야 할 민족혼 불어넣기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민족을 떠난다면 국군의 존재 이유, 전통, 이념, 자부심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4·19의 민주 바람 맞으며 '민족'을 외치다

그래서 내 영혼을 바쳐 후배들에게 쏟아낸 사자후는 대부분 민족혼과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외침이었다. 항일 독립전쟁의 빛나는 전통과 넋을 우리가 이어왔음을 늘 크게 강조했다. 그러나 당시 난 군이 친일세력들의 독무대가 돼 있다는 사실 자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무도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다.

매주 월요일은 대대점호 날이었다. 목사들이 설교를 준비하듯이 난 1주일 동안 이날 아침 후배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준비했다. 일요일엔 학교 뒤 92고지를 오르내리며 다음날 생도들에게 들려줄 한 마디를 되풀이해서 연습했다.

내 부르짖음에 대한 후배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사실 당시 민족을 생각하는 열정으로 외쳤을 뿐, 알맹이와 깊이를 갖춘 정연한 논리는 내게 없었다. 그럼에도 나와 이야기하고 싶다며 후배들이 취침 시간에 내 방에 찾아왔을 땐 내심 당황하기도 했다.

4·19 이후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이승만 독재 권력이 묶어놨던 많은 금서들이 해제되던 때였다. 나는 라이트 밀즈의 <들어라 양키들아>를 눈물 흘리며 탐독했고 조용수 사장이 발간한 <민족일보>를 구독했다.

또한 난 하급생들에게 '기합'을 준 다음엔 반드시 민족적 자존심을 일깨우기 위한 교육을 실시했다.

"귀관들! 손에 든 소총이 어느 나라 것인가? 배낭은? 야전삽은? 모포는? 대검은? 심지어 숟가락과 양말, 군화에도 U.S.A라 쓰여 있지 않은가? 우리가 완전군장하고 뛸 때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어떻게 들리는가? 정신 차리고 자주적 군대가 되라는 소리로 들리지 않는가? 조소로 들리지 않는가? 아직은 우리가 너무 가난해 이렇게 도움을 받고 있지만 영혼마저 빼앗겨서는 안 된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물론 지금은 무기를 포함한 이런 하드웨어는 우리 것으로 다 바뀌었다. 그러나 자주적인 국방 의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방향으로 군대 문화가 바뀌려면 아직도 한참 멀었다.

내 고등학교 동기였으나 1차 신체검사 전날 먹은 양고기 때문에 피부 두드러기가 나 1년 늦게 육군사관학교에 수석으로 합격해 19기로 임관한 국영주라는 친구가 있다. 고등학교시절 공부를 비롯해 여러 방면에서 이름을 날리던 친구였다. 내가 중매를 서 지금 미국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대위 때 대한극장 앞 어느 제과점에서 이 친구를 만났다. "야! 표명열! 사실 너, 고등학교 땐 별로 알려진 존재가 아니었는데 육사에 와서 보니 참 대단하더구나. 너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 친구는 내게 분에 넘치도록 칭찬해줬다.

나도 반갑게 답했다. "그래! 고등학교 때 너희들은 모두 여건이 좋았지만 난 사실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고학생이나 다름없이 참 힘겹게 생활했지! 그냥 정신없이 지냈어!"

그 친구는 내가 대대장 생도 때 매주 한번 들려준 훈화에 자신을 포함한 많은 후배들이 늘 숙연한 감명을 받았다고 말해줬다. "어디서 그런 신념에 찬 생각이 나온 거냐? 사람들을 열정적으로 감화하는 네 능력은 참 대단했다!"

난 당시 이과 과목 위주로 짜인 학교 공부를 멀리 던져버렸다. 그 대신 여러 사회과학 책을 탐독하며 눈물 흘리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 시대의 운동권 대학생들처럼, 나도 나름대로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확립하고자 노력했다. 역설적으로, 내가 군을 택하지 않았다면 어둠의 독재 시절 동안 무사히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도 많다.

오늘날 평화재향군인회를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예정되고 준비된 길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혼자 슬며시 웃는다. / 표명열 기자 (예비역 준장)
 
 

올려짐: 2006년 11월 27일, 월 10:39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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