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리포트 56] 미국 고교 '졸업 연설자' 타이틀, 참교육 멍들게 한다 [print]

과다경쟁 말썽...다수의 '졸업연설자' 뽑는 학교 증가

(올랜도) 김명곤-강수진 기자 = 가을 학기에 새 학년도를 시작하는 미국의 각급 학교는 5월과 6월을 졸업식 행사로 분주하게 보낸다. 특히 각 고등학교는 대규모 체육관이나 공연장을 빌려 대학 졸업식에 버금갈 만큼 성대한 졸업식 행사를 치른다. 그런데 미국 고등학교의 졸업식 광경의 백미는 '발레딕토리안' (valedictorian-최우등생 졸업연설자)의 고별 연설 장면이다. 재담 섞인 연설을 하는 연설자나 이를 듣는 동료 학생들과 가족들은 내용과 관계없이 이 장면을 평생의 추억거리로 삼는다.


▲ 지난 5월 25일 플로리다 올랜도의 티디 워터하우스 실내 공연장에서 벌어진 레이크 메리 고등학교의 졸업식에서 식이 끝난 후 폭죽이 터트려지고 있는 광경

발레딕토리안의 고별 연설을 특징으로 하는 미국 고등학교의 졸업식 광경은 미국에서 하나의 전통문화 처럼 자리 잡은지 오래이며, 발레딕토리안 타이틀은 종종 훌륭한 성취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부시 대통령은 얼마전 사무엘 앨리토 주니어를 미국 대법원 판사로 지명하면서 그가 고등학교에서 발레딕토리안이었다고 덧붙여 소개했다. 미 역사상 최 다선 및 최 고령 의원으로 유명한 로버트 비어드 상원의원도 1930년대에 웨스트 버지니아 산골짜기의 마크 트웨인 고등학교에서 28명 정원의 학급 대표로 졸업식 고별사를 했다고 자신의 웹 사이트에 자랑스레 소개하고 있을 정도.

그런데 최근 미국의 상당수 고등학교에서는 이같은 전통을 깨고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새로운 변화란 단 한 명의 최우수 졸업생을 대표로 뽑아 졸업식 고별사를 맡기던 데서 벗어나 평점 4.0 이상을 받은 모든 학생들에게 동일하게 고별사를 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움직임은 고등학교가 지나친 경쟁의 장이 되고 있다는 우려 속에 수 년 전부터 일기 시작했다.

학교수업 한 번도 참석하지 않은 학생이 발레딕토리안' 이라니...

발레딕토리안 타이틀을 얻기 위해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이 가산점을 주는 우등생 클래스 과목에 등록하는가 하면, 안전하게 A학점을 받기 위해 자신의 능력보다 낮은 클래스를 선택하거나 여러 과목을 추가로 듣는 등 각종 '편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지난 5월말 플로리다 유스티스 고등학교에서는 발레딕토리안 타이틀을 차지하기 위해 커뮤니티 칼리지(2년제 초급대학)에 등록해 높은 학점을 받은 고등학생교 여학생이 '졸업생 대표'로 뽑힌데 대해 한차례 대 소동이 일어났다.


▲ 미국 고등학교에서는 졸업시즌을 전후하여 졸업연설자 선정을 놓고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진은 고별연설자 선정 문제로 말썽을 빚은 유스티스 하이스쿨 (Eustis High)의 홈페이지.

아미 루인파(18세)라는 학생은 타 학교에서 전학해 온 이후, 소속 학교에서 수업을 전혀 듣지 않고 인근의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여러 과목을 수강해 평점 4.7로 발레딕토리안이 되었다. 일단 플로리다 주 법은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이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과목을 수강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아미가 고별 연설자가 된 것은 아무런 하자가 없다.

그러나 동급생들은 마이스페이스 웹페이지에 그녀를 야유하고 위협하는 글들로 도배했다. 학생들은 "우리학교 식당에서 최고의 메뉴가 치킨 너갯과 매쉬드 포테이토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나, 학교에 불이 났을 때 어떠했는지를 기억하는 누군가가 고별사를 해야 한다"면서 "아미가 누구지?"라는 문구가 쓰여진 티셔츠로 교실 복도를 뒤덮고 졸업생 대표를 다시 뽑아 달라는 청원서를 냈다. 학교 당국은 물러서지 않았으나 사태가 험악해진 것을 안 아미는 결국 졸업식날 고별 연설을 포기해야 했다.

"최우등생 한 명 선정 부당하다" 아예 수 십명 뽑는 학교도

이같은 사례는 미국내 고등학교 졸업시즌을 전후하여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발레딕토리안 타이틀을 얻기 위해 경쟁을 하다 법정 소송까지 제기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져 왔다. 경쟁이 심하다 보니 학교 당국은 최우수 학생을 선발하는데 큰 고충을 겪게 되고, 선발한 후에도 뒷말이 무성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

결국 교육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과다 경쟁이 정상적인 학교교육을 망치고 있다며 졸업식 고별사를 아예 없애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상당수의 일선 교사들도 현재와 같은 학점 시스탬 아래서는 최우등생 한 명을 선발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예 여러명의 발레딕토리안을 내는 것이 공평할 뿐더러 단 한 명을 선발해야 하는 고충도 없애고 말썽도 줄이자는 것이다.

가령 지난 5월 29일 오후 버지니아주 패어팩스 로빈슨 고등학교 졸업식에서는 크리스티나 에지미, 트라비스 할버트, 조나단 크로스를 포함한 41명의 졸업생들이 발레딕토리안 고별사를 했다.

평점 4.15로 로빈슨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크로스는 <워싱턴 포스트> 6월 17일자에 "최우수 성적 졸업생이라는 하나의 타이틀을 위해서 서로 경쟁하지 않고 상호 협조적인 분위기를 이루며 공부했다"면서 "친구들과 우등의 영예를 함께 나누어서 매우 행복하다"고 소감을 말했다.


▲ 고별 연설자로 뽑힌 한 학생이 졸입식에서 고별연설을 하고 있는 모습.

로빈슨 고등학교의 교장인 메이어도 "68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큰 학교에서 단 한 명의 학생을 선발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면서 “40여명의 학생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평점 4.0 이상을 받았다면 그들 모두를 포상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패어팩스 에디슨 고등학교의 그레고리 크로헨 교장은 근소한 차이의 학교 성적으로만 단 한 명의 발레딕토리안을 뽑는 것이 너무 불합리하기 때문에 평점 4.0 이상이 되는 모든 학생들에게 발레딕토리안의 영예를 안겨줘야 한다고 관련 학교 정책의 보완을 요구했다.

그는 “만일 우리가 달리기 경주를 한다면 분명 경쟁이지만, 우리는 결코 교육 과정을 그렇게 경쟁적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면서 "교육의 목표는 더 높은 평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배우는 데 있다.”라고 말했다.

"경쟁사회에서 승자와 패자 생기는 것은 당연" 주장 여전

그러나 이같은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측들도 있다.

같은 패어팩스 카운티의 옥슨 힐 고등학교의 여러 명의 고별 연사 중 한 명인 로빈 버거스 라는 학생은 모든 학생이 승자가 될 수 있다는 주장에 별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이번 가을 콜롬비아 대학에 입학하는 버거스는 9학년때부터 줄곳 발레딕토리안 이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그녀는 세계사 수업에서 A를 받기 위해 논문 과제에서 95점 이상을 꼭 받아야만 했는데, 교사는 12페이지 정도의 분량을 요구했다. 그녀는 최선을 다해 완벽에 가까울 정도의 26페이지 분량의 논문을 제출했다.

버거스는 졸업연설에서 동료 학생들에게 목표를 위해 집중해야 할 것을 강조하면서 "정말로 원하는 것을 위해 목표를 설정하고 최선을 다 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여러분 스스로가 어떤 각오를 하기 전에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옥슨 힐 고등학교 고던 리비 교장은 버거스의 말에 동의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삶 내내 치열하게 경쟁해야만 하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승자가 되고 다른 사람들은 패자가 된다"며 학교 내 경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올해 우드로우 윌슨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메사드 마흐무드는 "10학년 이후 줄곧 발레딕토리안으로서 내 자신을 꿈꾸어 왔다"면서 "다수의 사람들이 영광을 함께 차지하게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경쟁적이거나 굉장히 신나는 일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현재 미국내 대대수의 지역 교육청들이 아직까지 교육자들이나 학생들 사이에 발레딕토리안의 수를 정하는데 분명한 제한을 두지 않고 있다. 버지니아의 패어팩스 카운티는 학교마다 자치적으로 결정토록 하고 있는데, 단 한 명의 발레딕토리안을 뽑는 학교도 있고 로빈슨 고등학교 처럼 40명의 발레딕토리안을 뽑는 학교도 있다.

분명한 것은 단 한 명의 발레딕토리안을 뽑는 현재의 제도에 대해 교육전문가나 현장의 교사들로부터 비판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가고 있고, 이에 동조하는 학교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나친 경쟁에서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들 간의 인간 관계가 파괴되고, 관계가 파괴된 채 지식만 주입하는 교육은 학생 개인이나 사회에 건강한 가치를 제공해 주지 못한다는 반성 때문이다.

플로리다 세미놀 카운티 셔만 윌리암스 전 교육정책국장은 "특히 공교육 시스탬에서는 죤 듀이가 말하던 '배움에 대한 좋은 습관'을 길러 주는 것이 우선이다"면서 "단 한명의 발레딕토리안을 뽑는 현재의 시스탬은 학생들의 창의성을 저해하는 것은 물론, 공동체적 가치를 포기하도록 조장한다는 면에서 퇴행적이기까지 하다"고 비판했다.
올려짐: 2012년 3월 16일, 금 7:01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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