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에 가장 심각한 기저질환, 불평등 [print]

[기고] 안희경 재미작가 "내일은 오늘의 생각과 선택 속에 이미 있다"


▲ (마이애미 EPA=연합뉴스) 11일(현지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마이애미 이그제큐티브 공항" 앞에서 활동가들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희생자 21만5천명을 의미하는 숫자판을 들고 촛불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들은 코로나19 완치 여부가 불분명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 유세를 강행하려는 데 대해서도 항의했다. ⓒ 연합뉴스

(뉴욕=오마이뉴스) 안희경 기자 = 철옹성이던 샌프란시스코의 집값이 떨어졌다. 아파트 임대료가 20% 떨어졌고, 샌프란시스코 부촌의 저택 값이 10% 내렸다. 값이 내렸다고 해도 이 동네의 중위 주택 가격이 4백만 달러이기에 평균 5백만 달러에 육박하던 집이 450만 달러에 팔린 상황이다. 뉴욕 맨하탄의 집값은 33%나 하락했다. 샌프란시스코보다 더욱 비싼 집들이다.

코로나 이후 도시 탈출 경향은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서 뚜렷이 나타났다. 물론 원인은 단순하지 않다. 그 안에는 대규모 실업이 만들어낸 비극도 있다. 그럼에도 원격 근무를 하는 사람들의 경우, 굳이 대도시에서 비좁은 공간에 갇혀 있을 이유를 잃었다.

교외로 이사한 백인 중심 부유층의 가구 수가 데이터로 잡혔다. 이들의 경우 자연과 가까이 있고자 했던 계획을 코로나 봉쇄 속에서 앞당겨 추진한 것으로 부동산 전문가들은 파악한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팬더믹 봉쇄 상황을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의 조건으로 상정한다고도 밝혔다.

2020년, 세계는 저성장이라는 기본값을 안고 추락해왔다. 각국 정부는 각자의 에어매트 위치를 조정하며 어디에 착지할 것인지 가늠하느라 여전히 분주하다. 과연 마이너스 성장 시대에 우리는 안전할 수 있을까?

스위스 유니온 은행(UBS, Union Bank of Switzerland)는 최근 세계 억만장자의 재산이 지난 4월부터 7월까지 27.5% 늘어 10조 달러가 넘어섰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 10조 달러는 원화로 1경하고도 1천조 원이 넘는 액수다. 2021년 한국 예산이 558조 원이니, 우리나라 국민이 약 20년을 살아낼 금액이다.)

위기 속에서도 자산은 그 규모와 비례해 성장하고 있다. 성장을 구가하던 시기에도 그 번영의 이익은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우리는 이를 반복 학습한 상태이다. 그리고, 여전히 위기의 전파 방식은 매몰차다. 약한 고리를 강타하고 취약한 사람들을 먼저 쓰러트린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중간계급(middle class)이 복구되기까지 10년이 걸렸다.

불평등한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병증

하위층이 미처 일어서기 전, 코로나 바이러스가 덮쳤다. 하나의 생산 벨트로 연결된 세계화 경제 구조가 무너지며 그 속에서 약자의 삶부터 급격히 해체되었다. 구직시장까지 얼어붙은 현재 학자금에 생활자금 대출 빚을 지고 사회로 나온 한국의 20대들은 개인회생 신청을 하고 있다. 그 신청 건수가 코비드 이후 21%로 급증했다.

취약한 이들에게 경제는 성장률에 있지 않다. 경제는 곧 생계다. 나와 가족이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돈벌이가 경제이자 집이며 끼니다. 그러하기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건 산불로 숨이 답답하건 한국과 미국의 노동자들은 일터로 뛰어든다.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알려준 유일한 사실이 있다. 기저질환이 있는 사람의 사망률이 훨씬 높다는 점이다. 심장병, 당뇨병, 호흡기 질환같이 이미 기본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이들에게 코로나19는 치명적이다. 비만 또한 코로나19에 걸릴 확률을 높이고 사망할 확률을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밝혀졌다.

이 요소들은 불평등한 사회에서 지위가 낮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뚜렷한 병증이다. 외부의 힘을 조절하기 어려운 위치일수록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기에 질병에 시달린다. 불평등 지수가 높을수록 그 사회 전체의 건강도 또한 약화했다. 지난 40년가량 진행해온 공공 역학 연구가 이를 뒷받침한다.

석 달 동안 미국 서부 지역에서 타오른 산불로 노란 해가 뜨고 붉은 달이 떴다. 그동안 오염된 공기 속에 노출된 사람들의 위험도 기저질환이 있는 이들에게 치명적이었다.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산불이 번지는 근본 원인이 지구의 자원을 오로지 이윤을 위해 자연자원을 추출해온 인간 활동에 있다는 것을 안다.

기후위기 속에서 더욱 심각한 재앙이 더 빈번히 세계를 덮칠 것이라는 것을 과학자들이 입을 모아 예견하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복원해야 할까? 우리 문명이 갖고 있는 기저질환, 세계화된 경제가 보유한 기저질환, 바로 나와 이웃이 속한 불평등이다. 당장 앞으로 이어질 더 큰 파괴적 재앙을 막겠다고 지구적으로 결의한다 해도 이미 축적된 파괴로 인해 발생할 재앙에 대처하려면 우리는 불평등이라는 기저질환을 치료해야만 한다.


▲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코로나19 리소스센터 홈페이지 갈무리. ⓒ 존스홉킨스대학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대담할 수 있다"

1950~1960년대 스웨덴 사민당은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대담할 수 있다(Secure people dare)"는 구호를 외쳤다. 안전망이 있어야 스스로 상황을 직시할 수 있고 타인의 삶, 나아가 나와 다른 종(種)의 삶을 살피며 지구의 환경을 위한 과감한 변화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공공역학자 케이트 피킷은 지난 봄 인터뷰에서 "불평등한 사회에 사는 경험은 인간의 사고와 감정은 물론이고 관계 맺는 방식마저 바꾸고 있다"고 말했다. 경쟁 구조 속에서 개인은 가난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 더욱 강도 높은 경쟁으로 달려들게 된다. 살아남기 위해서다. 안전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경쟁 체제는 그 속에서 더욱 강화된다.

경쟁으로 치닫는 관성을 사회가 제어하지 못하면 모두의 안전이 위태로워진다. 전체의 안전한 생존이 보장되는 사회·정치·경제적 틀을 국가가 마련해야 하는 이유이다. 직장을 잃어도 거리로 나앉지 않고, 아프면 병원에 갈 수 있고, 누구나 교육받을 수 있는 권리를 누릴 때 사회 전체의 건강도는 올라간다. 곁을 돌아보고 미래를 염두에 둘 마음의 틈이 열린다.

가장 평균적인 중위 소득자 한국인은 160만 원 벌이로 한 달을 산다. 2020년 최저시급 8590원으로 하루 8시간, 주 40시간 근무를 기준으로 하면 주휴수당을 포함해 월 179만5310원을 받는다. 중위 소득자보다 10만 원을 더 버는 셈이다. 하위 소득 50%는 어디서 얼마를 받고 일하는 것일까? 그만큼 GDP 3만 달러 시대를 만끽하는 대부분의 한국인은 꼭대기 여유 계층에 몰려 있다는 말이다.

만약에 마지막 하위 20%에 속하더라도 최저임금 선으로 지탱할 수 있는 삶이라면? 추락해도 인간다울 수 있는 바닥 위에 안착한다면, 사회의 불안도는 현격히 낮아질 것이다. 나의 생존이 보장되지 않을 때, 공유지는 생계 수단으로 다가오고, 자연 또한 이윤 추구를 위한 도구로만 보일 수 있다.

코로나 이후 과연 어떤 '뉴 노멀'이 도래할지에 대한 의문과 기대가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질서는 저절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어제까지 축적된 문제가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오늘을 파괴하듯, 풀지 못한 오늘의 고통이 내일을 파괴할 수 있다.

반다나 시바 "진정한 배움은 머리와 가슴과 손을 함께 써야"


▲ 미국의 비영리단체 IISC(Interaction Institute for Social Change) 소속 작가 앵거스 매과이어가 평등(equity)와 공평(equity)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그림 ⓒ /interactioninstitute.org

우리는 어떤 정책을 추구해야 할까? 지난봄 코로나19 위기를 진단할 때, 반다나 시바는 "이제 탐욕으로 움직이는 자기중심적인 세상(egocentric world)에서 나와 지구의 삶을 평화로이 영위하는 생태 중심 세상(eco centric world)으로 나아가자"고 제안했다.

그는 다음 단계의 경제는 자연을 위해 일하는 경제가 되리라 예측했다. 같은 지역에 있는 소비자에게 의지하는 순환경제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미 풀뿌리 조직뿐만 아니라 지방정부들까지 나서고 있는 대안으로 이는 지역경제 중심으로 나와 나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나와 지구 전체와의 관계를 복원하는 경제이다.

그는 관계 속에 있는 개인의 각성을 촉구했다.

"우리들은 소비자가 되면서 작아졌어요. 뭔가를 주문하기만 합니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면서도 우리의 손은 뭔가 멋진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손은 바느질을 할 수 있고, 텃밭을 일굴 수도 있습니다. 진정한 배움은 머리(head)와 가슴(heart)과 손(hand)을 함께 쓰는 가운데 일어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지성은 성장합니다. 순환 경제는 우리가 가진 다양한 지성이 모든 차원에서 순환하는 거죠. 우리는 단지 데이터로 보이는 소비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역공동체 안에서, 지구 가족들 품에서, 그리고 우리 자신 안에서 활동하는 창조적인 인물들입니다."

반다나 시바가 주장하는 순환경제는 먹는 사람과 기르는 사람이 연결돼 있는 관계다. 우리가 생산자와 맺고 있거나, 우리의 텃밭 농사와 맺고 있는 그 관계가 (우리 밥상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 기업의 제품을 보면 생산자와 멀어진 우리의 현실을 알 수 있다.) 브랜드이기에 우리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관계를 보살필 필요가 있다.

지역경제는 단지 환경을 위해 탄소발자국을 남기는 거리를 줄여 지역 중심으로 돌아서자는 의미가 아니다. 물류의 이동 거리를 줄이고자 하지만, 관계 맺기는 거리를 넘어선다. 우리는 의식 속에서 관계의 거리를 무한대로 넓혀낼 수 있다.

아마존 원주민의 안녕을 염려하며 지구의 허파를 지켜낼 수 있고 종(種)을 넘어 순록의 생존을 위해 툰드라 해빙을 막아 지구의 온도 상승을 멈출 수도 있다. 바로 모든 존재가 연결돼 사는 상호존재(interbeing)라는 현실을 깨닫는 길이다.

"지구의 모든 생명은 생명 아닌 것을 포함해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다. 그 진실을 개인들이 알아차리도록 자신의 지능과 감각을 살려(holistic) 사고해낼 수 있도록 하려면 사회는 개인이 생존에 매몰되지 않고 안전을 느끼도록 보장해야 할 것이다. 그 속에서 개인은 세상의 모든 존재를 받아들여 통합된 자아로 나아갈 자유를 누릴 수 있으리라. 개인과 지구와의 관계를 복원하는 바탕인 안전망을 복구하는 것이 정책(사회 시스템)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본다."

지그문트 바우만 "왕은 죽었고 새 왕은 오지 않았다"

경제 불평등은 대안 활동이 벌어지는 현상 속으로도 스며들어와 있다. 유기농 식자재를 구입하고, 생산자들이 주기적으로 보내오는 꾸러미를 받으며 도심 텃밭을 일구려는 이들의 삶의 조건을 보면 교육받은 중산층이라는 공통점이 보인다.

대안교육을 찾고, 공동체적 삶을 일구고자 모인 이들을 찾아갔을 때도 그들의 교육 수준은 상대적으로 높았다. 코비드(COVID) 속에서 원격근무를 할 수 있는 이들이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의 고통과는 거리를 둔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는 모습과 닮아있다.

미국에서 대안적 삶을 추구하는 공동체를 찾기 시작했던 11년 전, 그들 대부분은 백인이었다. 최근에는 라틴계를 비롯해 다양한 인종이 비록 소수지만 자리한다. 그들 역시 고등교육을 받은 구직시장에서 상대적 우위를 점하는 이들이다. 최근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경제적으로 상위에 있는 국가들에서 보이는 학력에 따른 정치 성향 패턴과 맥을 같이 한다.

1970년대 진보의 주류였던 노동계급이 현재는 보수화되고, 대학을 나온 중상층이 진보를 이끄는 현상이다. 당연히 정책의 방향은 상위소득 20%인 중상 계층을 비롯한 중간계급의 이익을 우선하게 된다.

코비드 시대, 그 어느 때보다 생태적 전환이 주요 아젠다로 떠오르는 시절, 경제 불평등의 그림자가 대안적 활동을 모색하는 지점에까지 드리워져 있는 현실을 우리는 보살펴야 한다. 국가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는 보이지 않는 이들의 요구가 우선순위에 닿을 수 있도록 힘을 실어야 한다.

2014년 인터뷰에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을 인용하며 "왕은 죽었고 새 왕은 오지 않았다"라고, 빠른 세상 흐름 속에서 불안에 휩싸인 우리가 사는 시간을 '인터레그넘(interregnum)', 즉 궐위의 시간이라고 했다.

역사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궐위의 시간을 맞이했다. 그 시간들 가운데는 역사의 분기점으로 작용했던 파괴의 순간, 혹은 변혁의 순간이 있었다. 어떤 시간 속에서 역사는 진전했고, 어떤 시간 속에서 역사는 다시 퇴행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맞은 아직 쓰이지 않은 이 시간도 숱하게 흘려보낸 과거 '궐위의 시간들' 위에 있는 것일 수 있다. 반복하여 놓쳐버린, 역사를 새롭게 쓸 기회이다.

오늘 수많은 개인이 내린 선택의 집합 속에 내일 우리가 살아갈 밑그림이 펼쳐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일은 오늘의 생각과 선택 속에 이미 있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0년 12월 22일, 화 9:35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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