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회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print]

[김삼웅의 인물열전] 박정희를 쏘다, 김재규장군 평전 / 16회] 김재규는 유정회 국회의원의 신분이 부끄러웠다

(서울=오마이뉴스) 김삼웅 기자(전 대한매일신보 주필) = 김재규는 대장으로 진급하지 못하고 3군단장을 끝으로 예편된 데 아쉬움을 가졌지만, 큰 무리 없이 25년의 군생활에 마음을 다스리면서, 이제 시골에 내려가 조용히 지낼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유신정우회(유정희) 국회의원에 추천되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감투가 떨어졌다. 예비역 장성 8명 중 하나였다. 유신체제는 정치구도상으로는 통일주체국민회의와 유정회라는 두 '괴물집단'에 의해 유지되었다. 흔히 '통대'라고 불리는 전자는 체육관에서 대통령과 정족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국회의원을 한 번 투표 방식으로 선출하는 어용기구이고, 유정회는 대통령이 지명하여 통대에서 '비준'된 관선 국회의원 집단이다. 역시 어용기관이다.

유신정우회는 1973년 3월 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9대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국회의원들이 구성한 준정당의 원내교섭단체를 말한다. 유정희의 성격은 정치적 조직이면서 정당도 아니고 사회단체도 아닌 특수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활동목표를 유신헌법 체제의 수호 및 발전, 국회의 직능대표적 기능에 둔다고 하였으나, 실제적으로는 대통령이 국회를 장악하기 위한 원내 전위부대로서 거수기의 역할을 맡았다. 일제 말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대정익찬회와 비슷했다.

제9대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를 치른 지 1주일 후인 1973년 3월 3일 박정희는 유정회 국회의원 후보 73명과 예비후보 14명의 명단을 확정, 이를 통대회의에 일괄추천했다. 후보자의 소속 분야별로 분석해 보면 징계인사 20명, 학계 7명, 교육계 3명, 예비역 장성 8명, 여성계 8명에 사회각계 4명으로 되어 있었다.

이렇게 박정희 정권은 유정회 국회의원을 빌미로 권력지향적인 대학교수, 학자, 문필가, 언론인들을 체제내로 편입시켰고 이들은 박정희 정권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국회는 물론 국회 밖에서도 유신체제를 옹호하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주석 2)


▲ 1973년 6월1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수운회관에서 열린 유정회 현판식에 박정희(왼쪽)가 참여한 모습. ⓒ 보도연감

당시에나 지금이나 국회의원에 명을 건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김재규의 생각은 달랐다. 전혀 내키지 않는 감투였다. 더욱이 임명직 국회의원은 의식 있는 국민들의 조롱거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김재규 장군은 처음에는 "군인은 군인으로 끝나야지" 하면서, 끝까지 '김재규장군'으로 남기를 원하여 의원직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김재규 장군은 자신이 유신을 반대했으므로 유정회 의원직이 유신에서 생겨난 기괴한 의원직임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아서 의원직을 수락 못하고 고민하였다. 김재규 장군은 고민 끝에 그래도 나라를 위하여 뭔가를 하려면, 시골에 묻혀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마지못해 의원직을 수락했다. (주석 3)

유정회는 '출생의 신분'에 걸맞게 행동하였다. 의회 본연의 임무인 '민의대변'과 '행정부 견제'의 역할이 아닌 유신체제를 비호하는, 박정희 충견노릇에 영일이 없었다. 김재규는 그럴수록 유정회 국회의원의 신분이 부끄러웠다.


과묵한 그가 이런 의사표시를 사람들에게 한 적이 없어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다. 더욱이 그의 짧은 의원생활(그는 그해 12월에 중앙정보부 차장이 된다) 동안 그의 의정활동이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도 않았고, 그의 '뜻'을 펼쳐보인 적도 없어 더욱 알 길이 없다. 국회에서 그를 만났던 전 공화당의 중진 한사람도 그가 3군단장 시절 이후 계속 '혁명'을 꿈꾸어왔다는 그의 주장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것.

어쨌건 김재규에게 유정회 의원자리는 그리 좋은 자리는 아니었던 것 같다. 특히 지역구출신만을 진짜 국회의원으로 생각하는 세평 때문에 더욱 그러했던 것 같다. (주석 4)

중앙정보부 차장에 임명받고

왕조시대나 1인독재 시대에 그 권솔 아래에 있는 사람의 운명은 창조주의 권능에 못지않게 독재자의 의중에 작용된다.

김재규는 5ㆍ16쿠데타 이후 박정희의 장중(掌中)에서 헤어나기 어려운 처지였다. 내키지 않는 유정회 소속 국회의원을 지내고 있을 때, 1973년 12월 14일 중앙정보부 차장에 임명되었다.

아무리 비상식이 지배하는 시대라지만 현역 국회의원을 정보기관의 차장으로 임명하는 것은 비정상의 극치였다. 박정희의 용인술에 접근하기 전에 당시 정국상황을 살피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유신 선포를 앞두고 박정희는 이번에도 느닷없이, 1972년 7월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을 평양에 보내 7ㆍ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케 하고 이를 빙자, 유신쿠데타를 감행하고, 1971년 대선 때의 적수로서 해외에서 반유신 활동을 해온 김대중을 1973년 8월 도쿄에서 납치하였다.

이를 계기로 유신쿠데타 이후 최초로 10월 2일 서울 문리대생들이 반독재 민주화 시위를 전개하고, 시위는 곧 전국 대학으로 확산되었으며, 12월 말에는 함석헌ㆍ장준하 등 재야인사들이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정국은 유신헙법에 대한 개헌과 호헌세력으로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자료사진)

이런 시기에 박정희가 김재규를 중정 차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김재규와 박정희의 운명을 바꿔놓은 중앙정보부, 어떤 기관인가.

박정희는 쿠데타가 성공하자 안정적으로 권력을 유지하고자 1961년 6월 10일 법률 제619호로 '중앙정보부법'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제정ㆍ공포하여 중앙정보부를 창설했다. 중정은 이후 18년 동안 인권탄압과 정보장치의 대명사처럼 불리며 박정희의 수족이 되고, 결국 그 수장의 총격으로 창설자가 암살되기에 이르렀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발족된 중정은 "국가안전보장에 관련된 국내외 정보사항 및 범죄수사와 군을 포함한 정부 각 부서의 정보ㆍ수사활동을 감독"하며, "국가의 타 기관 소속 직원을 지휘ㆍ감독"하는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되었다.

중정은 군내부의 반혁명 기도나 민간정치인들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분쇄ㆍ저지하기 위해 비밀리에 조직되었다. 쿠데타의 2인자 김종필이 군부 내 기반이었던 특수부대요원 3천여 명을 중심으로 중정을 조직하면서 대통령(당시는 최고회의 의장) 직속의 최고 권력기관으로 군림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중정은 각종 정보ㆍ수사기관뿐만 아니라 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기관의 활동을 지휘ㆍ감독할 수 있는, 명실공히 최고 권력기관으로 현역 군인의 직접적인 참여를 통해 군부를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었다.

군사정권은 중앙정보부를 통해 정부기관ㆍ군부에 그치지 않고 사회의 모든 분야에 대한 실질적인 통치력을 발휘해 감시와 통제활동을 벌여서 국민에 대한 통치를 구체화시켰다. (주석 5)

그러면 중정의 뿌리는 어디이고 사력은 어떠하며 김재규가 꺼려하던 당시 중정부장 신직수는 어떤 인물인가.

쿠데타로 창설된 중앙정보부는 미국 CIA에서 조직 명칭을 따왔고, 후에는 CIA 교범으로 요원들을 교육시켰다. 그러나 중앙정보부의 탄생 배경은 오히려 소련의 KGB와 유사하다. 즉 쿠데타 이후 이른바 '혁명 보위기구'로 출범하였던 것이다. 또한 조직에서도 KGB처럼 해외와 국내부문을 통합한 것도 유사점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소련의 지원으로 국가 구조를 만든 북한이 정보와 대내 보안을 분리한 반면, 미국의 영향 아래 국가 구조를 만든 한국이 소련의 KGB처럼 정보와 보안 기능을 통합한 정보기관을 가졌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중앙정보부는 끊임없이 계속된 반혁명의 위협 속에서 "국가 안전 보장과 관계되는 국내외 정보 사향 및 범죄 수사와 군을 포함한 정부 각부의 정보 수사 활동을 조정 감독"하는 무소불위의 국가정보기관으로 성장했다. (주석 6)

유신체제에 반감을 품어온 김재규는 중앙정보부 차장이 크게 내키지 않았다. 어머니를 비롯하여 가족ㆍ친지들이 모두 반대하였다. 중앙정보부가 국민의 원부처럼 비판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현직 부장 신직수는 군대 서열상 한참 후배였다. 자신이 5사단 (사단장은 박정희) 참모장으로 있을 때 신직수는 법무장교(소령)로 근무중이었다.

7대 신직수 부장(1973. 12. 3~1976. 12. 3)은 박정희 법무참모를 지낸 군 법무관 출신으로 중앙정보부 창설 이후 첫 법률가 출신 수장이었다. 법률가인 신직수는 취임 이후 유신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제6국을 강화하고 공안사건을 조작하였다.

문인간첩단과 민청학련사건, 인혁당사건은 법률가인 그가 부장으로 재임 중에 발생한 대표적인 조작 사건들이다. 그는 또한 『동아일보』 광고주들을 협박해 광고를 해약시키는 등의 언론 탄압을 기획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석 7)

<주석>
2> 김삼웅, 『박정희 평전』, 275~276쪽, 앤길, 2017.
3> 오성현, 앞의 책, 95쪽.
4> 김대곤, 앞의 책, 126쪽.
5> 김삼웅, 앞의 책, 156~157쪽.
6> 김당, 『시크릿파일 국정원』, 132쪽, 메디치, 2016.
7> 앞의 책, 138쪽.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1년 6월 11일, 금 3:17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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