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살린 아빠, 그땐 몰랐어요 아빠의 상태를 [print]

[세월호 의인과 꼴통, 김동수 가족 이야기] 작은딸 김예나편 ① 나, 김예나


▲ 세월호 의인 김동수씨의 작은딸 김예나. ⓒ 이희훈

(서울=오마이뉴스) 변상철 기자 =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7년이 지났지만 진상규명은 여전히 진행중입니다. 이런 가운데 참사 현장에서 살아남은 이들과 이들을 지키려는 가족들조차 아직도 매일 악몽을 꾸며 고통 속에 살고 있습니다. 세월호 생존자 중 '파란바지 의인'으로 알려진 김동수씨 가족 인터뷰를 통해 세월호 생존자와 그 가족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생생히 전해드립니다. 이번 글은 작은딸 김예나씨의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제가 6살, 7살이었던 것 같은데 김녕에 있는 할머니 댁에 주말마다 갔어요. 엄마 아빠가 일하느라 늘 바빠서 주말에는 할머니 댁에 놀러갔거든요. 한번은 할머니가 저에게 용돈 하라고 천 원을 주셨어요.

천 원을 잘 둔다고 두었는데 나중에 아빠가 제가 천 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는 할머니 집에서 훔쳤다고 오해했어요. 아빠가 불같이 화를 내면서 김녕 바닷가로 저를 데리고 가더니 저한테 '너 이 손, 도둑질 하는 손 아니야. 도둑질 하는 손은 벌을 받아야 해' 하며 그 바닷가에서 엄청 혼내신 적이 있어요.

그때는 나이도 너무 어리고 아빠의 화내는 모습이 너무 무서워서 제대로 해명을 못했어요. 물론 아빠로서는 저에게 돈을 준 적이 없는데 갑자기 제가 천 원이라는 돈을 가지고 있으니 훔쳤다고 생각할 만도 하지만 그때는 너무 했어요.

그날 이후로 아빠한테는 거짓말 하면 안 된다거나 남의 물건에 손대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각인됐어요. 아마도 그게 아빠 나름의 훈육 방식이었겠죠. 훈육은 확실하게 됐던 것 같아요. 그 뒤로 물건을 훔친다거나 거짓말을 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제 기억에 초등학교 간 이후로는 아빠가 거의 혼내지 않았어요. 이게 제가 어렸을 때 기억나는 것 중 하나예요.

또 하나 아빠가 자전거 사준 것이 기억에 남아요. 뭔가를 가지고 싶다고 하면 엄마는 조건을 붙이는데 아빠는 딸들이 뭔가를 원하거나, 하고 싶다거나, 갖고 싶다면 무조건 오케이 하는 사람이거든요.

한 번은 자전거를 너무 갖고 싶어서 사달라고 했는데 엄마가 "성적이 이만큼 오르면 사줄게" 하는 거예요. 옆에서 듣고 있던 아빠가 "아이들이 자전거 사달라고 하는데 왜 조건을 다느냐"라면서 바로 자전거를 사줬어요. 성적이니 조건이니 이런 것을 붙이는 걸 무지 싫어해요. 뭘 하자 하면 항상 "오케이, 하자" 하는 아빠였어요.

또 다른 기억은 초등학생 때 아빠가 학교에서 육상 지도를 했었는데, 그때 아빠랑 물차(생선 배송차) 타고 학교 다닌 거요. 원래 버스를 타고 다니면 한 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인데 아빠 차를 타고 가면 금방 갈 수 있어 아침에 잠을 그만큼 더 잘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아빠 차를 타고 가는 것이 그렇게 좋았어요.

육상은 4~5학년 사이에 했어요. 주 종목은 800m 였는데 저는 육상에 소질이 없었고 언니가 잘했어요. 언니가 육상을 잘하니까 저도 잘할 거라고 생각하고 아빠가 해보라고 한 거죠. 사실 언니는 타고난 실력파고 저는 완전 노력파예요. 2년가량 해봤는데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그만두었죠.

지금도 저는 매일 운동을 하고 언니는 운동을 안 하지만, 집에 가서 언니랑 뛰어보면 여전히 언니가 더 잘 뛰더라고요. 언니를 못 이겨요. 언니는 타고난 것 같아요. 체력으로 보면 언니는 아빠 닮고 저는 엄마를 닮았어요. 대신 저는 언니보다 말을 더 잘하고 똑똑해요.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에요.(하하)

언니는 전학을 많이 다녔지만 저는 언니처럼 전학을 다니지는 않았어요. 함덕초등학교에 입학해서 거기서 졸업까지 마쳤으니까요. 언니는 부모님 직업 때문에 표선과 함덕을 왔다 갔다 하며 전학을 많이 다녔어요.

제가 학교 다닐 때는 부모님이 제주시 도남동에 있는 '구원수산'이라는 횟집을 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이름이) 너무 촌스럽죠. 그 횟집에서 먹고 자며 생활했어요. 저는 그 횟집이 너무 싫었어요. 일단 비린내가 싫었고요. 밤에 자려고 식당 테이블을 치우고 이불을 펴면 술 냄새, 담배 냄새, 퀴퀴한 냄새 그게 너무 싫었어요. 그때는 식당 안에서 담배를 피우던 시절이라 테이블 아래에 담배꽁초가 막 놓여있었거든요. 너무 싫었어요.

거기서 초등학교 4학년, 5학년 때까지 살았어요. 그래서 그런지 저는 생선을 별로 안 좋아해요. 회뿐만 아니라 구운 생선이라도 생선 종류는 별로 안 좋아해요. 유일하게 먹는 생선요리라면 각재기국(전갱이 국)이에요.


▲ 동수씨는 추억이 있는 함덕해변에 가족들과 함께 왔다. 둘째 딸은 아빠의 카메라 앞에 활짝 웃었고 동수씨도 그 모습에 웃었다. ⓒ 이희훈

아빠와 함께 화물차 '여행'

학교 다닐 때 중간·기말고사 끝나면 항상 화물 운전하는 아빠 따라다녔어요. 제가 먼저 아빠한테 같이 가자고 했어요. 아빠는 제가 고생할까 봐 먼저 그런 말을 안 꺼내요. 그래서인지 제 주위 친구들이나 학교에서는 아빠 직업이 화물 운전사라는 것을 다 알고 있었어요. 아빠와 가려면 수업을 빠져야 하니 학교에다 현장학습계획서라는 것을 내잖아요. 처음 현장학습계획서를 낼 때는 아무 말 없으셨던 선생님도 여러 번 내니까 이번에는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보기까지 하셨어요.

아빠 화물차 타고 같이 다닌다고 해도 저는 이동하는 동안 대부분 핸드폰을 하거나 자거나 하기 일쑤였죠. 아빠가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가끔 한 번씩 웃기는 말을 해서 재밌게 해주곤 하셨어요. 그때 아빠 따라다니면서 안 가본 데 없이 정말 많이 다녔어요. 처음 가보는 곳이 신기하고 재밌기도 해서 따라다니기도 했지만, 아빠가 그 먼 길을 혼자 운전하고 다닌다고 생각하니 쓸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같이 가기도 했어요.

아빠하고 길을 나서면 배를 타요. 아빠와 배를 탄다는 것이 우선 재밌고, 운전하는 중간 중간 휴게소 같은 곳에 들러서 맛있는 간식을 사 먹는 것도 좋았어요. 아빠하고 갔던 장소 중 기억나는 곳은 우선 서울이고요,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같은 유명한 곳도 기억나요.

담양은 메타세쿼이아 나무 길도 기억에 남지만 고생했던 일 때문에 더 기억에 남아요. 바나나를 실으러 갔는데 비가 엄청 쏟아졌거든요. 아빠와 비 쫄딱 맞으며 화물 포장을 했어요. 옷이 다 젖었죠. 그 와중에 근처에 있던 떡갈비 식당에서 떡갈비를 먹었어요.

아빠는 정말 맛집이라는 맛집은 다 알고 있어요. 함께 가면서 어디 휴게소에 들어간다고 정해지면 휴게소 들어서기 전부터 '이 휴게소는 조각피자가 맛있다, 프라페가 맛있다, 이 휴게소에서는 꼭 갈비탕을 먹어야 한다' 이런 걸 다 알고 있는 거예요. 음식뿐만 아니라 휴게소 어디로 가야 화장실이나 식당이 가까운지 다 알고 있었어요. 그때는 아빠가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그 길을 많이 다녔기에 그렇게 모든 시설이나 음식, 위치를 다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진짜 대단하네, 이런 거죠.

사실 어릴 때 꿈은 군인이 되는 거였어요. 샛아빠(작은 아빠를 뜻하는 제주 방언)가 공군이시거든요. 어릴 때부터 군인 한다고만 하면 샛아빠가 '여자는 군인 하는 거 아니다'라며 말렸어요.

그래서 뭘 할까 하다가 언니가 응급구조사 하는 걸 보니까 너무 멋있어 보였어요. 언니가 해부학 책 보는데 그 모습이 멋있어 보여서 나도 언니 따라 응급구조과 가겠다고 했어요. 사실 언니가 하는 건 다 멋있었어요. 육상도, 대학도 다 따라가게 되었죠. 저는 언니를 미러링(mirroring) 했던 것 같아요.


▲ 동수씨는 안방에 배게를 정리하며 자기를 혼냈던 옛날을 기억하냐며 물어 온 둘째 딸에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동수씨는 머쓱했는지 계속 침대를 정리했다. ⓒ 이희훈

응급구조는 내 운명

세월호 사고가 날 때 제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잖아요. 그리고 아빠가 자해하면서 힘들어할 때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입시공부에 세월호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죠. 결국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입시 점수가 더 안 나왔어요.

지원한 대학 다 떨어지고 소방관 꿈이라도 이루자는 마음에 공채 소방시험을 준비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어요. 그렇게 지내던 중에 포항에 있는 대학에서 합격했다는 연락이 왔어요. 처음에는 갈 마음이 별로 안 생기더라고요. 그런데 가족이나 친척, 친구들 모두 한번 입학해보라는 거예요. 가서 몇 달 다녀보다가 이게 아니다 싶으면 다시 돌아오면 되지 않느냐 이렇게 설득하는데 또 그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아서 일단 가보자는 마음으로 입학했죠.

포항에 있는 대학까지 가서 응급구조학과를 가게 된 것도, 거기서 어렵게 졸업하고 지금 대구의 한 병원에서 응급구조일을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운명처럼 준비된 뭔가 계획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세월호 사고가 났잖아요. 그때가 제 진로와 관련해서 간호사와 군인 사이를 갈팡질팡하던 시기였어요. 그런 시기에 세월호 사고가 났고 그 뒤로부터 뭔가 그렇게 자연스럽게 응급구조 쪽으로 딱딱 흘러갔어요.

언니가 응급구조학 공부하는 모습도 멋있어 보였고, 아빠가 사람을 살리고 나왔다는 사실도 너무 멋있어 보였어요. 세월호 사고 당시 아빠가 배 옮겨 타기 직전에 아기를 안고 있던 장면이 있잖아요. 그때 아빠가 어떤 감정이었을지 궁금했어요. 누구의 생명을 구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던 거죠.

그런데 그때는 몰랐어요. 아빠가 외상후스트레스가 심각하다는 것을요. 만약 진로를 고민하던 그때 아빠의 상태를 알았다면 아마 이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1년 6월 21일, 월 4:32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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