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한 세상, 왜 살아야 하는지 묻는 이들을 위한 책 [print]

무명이지만 의미 있는 삶들의 기록 <민병래의 사수만보>... "참된 삶은 낮은 곳에 있다"


▲ <민병래의 사수만보> 책 앞표지 ⓒ 현북스

(서울=오마이뉴스) 심규상 기자 = 가슴 어딘가에서 숨어 있던 감정의 덩어리가 울컥 피어 올랐다. 그럴 때면 컴퓨터 화면에는 어김없이 민병래 작가의 '사수만보'가 띄워져 있다. 그가 전하는 삶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제일 먼저 눈자위가 촉촉해진다. 다음 코끝이 찡해지고 그다음 가슴 속이 뭉클해진다. 진지하게, 겸손하게 삶을 대하는 사람들이 전하는 깊은 울림 때문이다.

그가 <오마이뉴스>에 연재하는 '사수만보'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의미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다룬다. 그가 수년간 연재해온 글들이 모여 최근 <민병래의 사수만보>(출판사 현북스)로 출간됐다.

충남지역 오일장을 69년 동안 지키는 장돌뱅이 이희천(94) 할아버지의 생애사는 근현대를 살아온 이 시대 대부분의 아버지의 삶이다. 경제적 밑천과 자산이라야 '몸뚱아리'와 '손고락 다섯 개'가 전부인 민초들은 장터를 오가듯 바지런히 걷고 걸으며 세상과 마주 섰다. 이희천 할아버지도 그렇게 몸뚱아리로 세상을 짊어지고 4녀 1남을 키웠다.

"만석꾼은 만 가지 근심인데 난 그저 '손고락 다섯 개'로 살았으니 내가 걱정이 뭐유?" 그의 반문 속에 느리지만 깊은 삶의 여유와 지혜가 느껴진다.

칠순이 넘은 용인 좌전마을 대장장이 김용환은 20대 때 대장간을 열고 지금까지 그 만의 '좌전칼'(생선용 막칼)을 만들고 있다. 힘들고 고된 데다 손가락이 으깨지고 몸 여기저기가 흉터투성이다. 얼굴은 쇳가루로 늘 범벅이다.

그래도 사춘기 시절부터 친구들에게 '우리 아빠'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딸들의 모습에 너무 고맙고 울컥해 풀무질을 멈추지 않았다. 민병래는 김용환에 대한 글 말미 '못다 한 이야기'에 김영환 선생은 지금도 대장간을 운영하고 있으며 뒤를 이을 청년 장인을 애타게 찾고 있다"고 전한다.

경북에서 한문 교사로 일하며 <한자 자원 사전>을 집필한 장영진 교사는 2018년 세종도서 학술 부문(언어) 우수도서로 선정됐다. 선정 사유에는 '기존 연구 성과를 능가할 정도로 그 자료의 방대함과 서술의 정밀함이 탁월하다, 실증적 훈고에 바탕을 둔 연구 태도는 동 분야 연구의 전범적 모델이 될 것'이라고 적혀 있다. 장영진 교사가 10여 년 동안 새벽 2시 반부터 책과 씨름해 정리한 6000여 자 9000여 쪽의 결과물이다.

야생 콩 종자를 찾아 수십 여년을 떠돌아다닌 정규화 교수의 삶은 경외감이 절로 든다. 절벽에서 가까스로 소나무 줄기에 매달리면서도 또 다른 손은 야생 콩 종자를 얻기 위해 '콩 씨'에 손을 뻗었다. 그렇게 수집한 7500여 종이 야생 콩을 세계 1, 2위의 종자회사에서 수십억 로얄티를 제안하며 넘길 것을 제안했다.

그는 아직도 "개인적 부를 위해 씨를 팔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며 '콩의 원산지가 중국이 아닌 한국'임을 밝히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이 글에서 글쓴이 민병래가 두만강(豆滿江)을 '콩이 가득한 강', '콩 실은 배가 가득한 강'으로 상상해 해석한 점도 이채롭다.

장기수 박종린이 '제 고향 북녘땅으로 보내 달라'며 글쓴이에게 회고한 그의 삶은 한 권의 역사책이다. 독립운동을 한 아버지, 1959년 남파돼 '모란봉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그는 1976년 대구교도소 내에서 조작된 '붉은 별사건'으로 두 번째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쌍 무기수로 34년간 교도소에서 살다 1993년 성탄절 특사로 출소한 그는 가족이 있는 북으로 송환되길 원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북으로 보내 달라고 탄원하던 그는 지난 1월 향년 89세로 별세했다. 그가 민병래에 남긴 인터뷰는 유언이 됐다.

"내게 내려졌던 34년은 분단이 안긴 과도한 형벌이고 양심과 사상을 옥죈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목숨과 함께 야만의 형벌이 끝나길 소망해봅니다. (...) 제 마음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두 개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리고 통일 코리아라는 하나의 조국이 있지요. 어서 하나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1950년 9월 입산해 3여 년 동안 지리산과 덕유산 '빨치산'으로 살았던 머슴의 아들 김교영은 8여 년을 교도소에서 생활했다. 그는 94세였던 지난해까지 '지리산'을 제대로 기록하는 일에 매달렸다.

이 책에는 모두 30여 명의 삶을 대하는 다르지만 진솔한 여정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


▲ 민병래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 권우성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는 추천사에서 "한 줄 한줄에 스며들어 있는 인생과 그것을 담아낸 작가의 정성이 눈물샘을 자극한다"라며 "그의 길에는 사람이 있다"라고 말했다.

우상표 바른지역언론연대 전 회장(용인시민신문 대표)은 "한 하늘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따듯한 시간이 느껴진다"고 했고,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사수만보 속 인물들은 검색되지 않는다, 속도가 아닌 방향의 흔적을 남기는 작가"라고 평했다. 박정희 연출가는 "한 편의 독립영화를 보는 것 같다"고 했고 김동훈 성프란시스대학 교수는 "민초들의 이야기에서 진한 사람 냄새가 난다"고 평했다.

백태웅 교수는 "이 험한 세상을 왜 살아야 하는지, 우리의 짧은 삶이 왜 살만한 것인지 답을 찾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했다.

글쓴이 민병래는 "사람들 눈은 높고 화려한 곳에 쏠려있지만 정작 진실과 참 인생살이는 낮은 곳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며 "이 사람들이 역사의 강물을 이룬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 시간이었다"고 밝혔다.

그가 지난 2년 반 동안 만나 기록한 사람은 쉰 여덟명이다. 그는 지금도 이름도 빛도 없이 의미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수만보'의 길을 걷고 있다. (본보 제휴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올려짐: 2021년 9월 20일, 월 2:24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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