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 어머님께 쓰는 편지

어머니, 벌써 4년째 카네이션을 직접 달아드리지 못하네요.

오늘 이곳은 오랜만에 봄날 같은 봄이었습니다. 여름이 곧 올 것 같이 무덥던 날들이 어제 내린 봄비로 평년 기온을 되찾았습니다. 조금 춥다싶은 정도의 상쾌한 날씨 속에서 아이들과 함께 오후에 산책을 나갔습니다.

어버이날이 실감이 나질 않았는데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 가방을 보니 어버이날이라고 카드와 카네이션을 준비했더군요. 그 카드와 카네이션을 미리 받은 것 때문에 마음 아픕니다. 내가 그렇게 어머니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려야 하는데 자식들에게 카네이션을 받고 나니 어머니 생각이 더욱 간절해집니다.

그리운 마음을 달래려 아이들과 산책을 나섰던 것이지요. 산책길에 보리밭을 만났습니다.

이곳 제주에서는 맥주보리라고 하더군요. 마음이 그래서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옛날 보리밟기를 하던 기억과 누렇게 익어가는 보릿대를 뽑아 보리피리를 만들어 불기도 하고, 이젠 배고픔 끝이라고 기뻐하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어머니, 작은 농어촌 마을로 내려간다고 하니까 "그려, 누군가는 그렇게 봉사해야지" 하면서도 "하필이면 왜 네가 가야되냐?"고 하셨죠. 그 '누군가'가 당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으셨지만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렇게 이곳에 둥지를 틀고 살아온 날이 벌써 다섯 돌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생각엔 몇 년 하면 올라오겠거니 하셨을 터인데 자식놈은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니 답답하시겠지요. 혹시 저 놈이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걱정도 되실 것 같습니다. 어떤 것이 능력인지는 모르겠지만 며느리나 아들이나 현대사회에서 뒤쳐지기 쉬운 고루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잖아요. 얼마 전 아내와 함께 서로를 보면서 "너나 나나 부자 되긴 틀렸어" 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부자는 물질적인 부자를 말하는 거랍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물질적으로는 풍요하지 못해도 도시에서 살 때보다 훨씬 풍족하게 살아간답니다.

오늘 저녁 식탁에 무엇이 올라왔는지 아세요? 혹시 잘못 먹었는지도 모르겠는데 뽕잎, 마늘쫑, 머위이파리, 참취, 상추, 더덕이 올라왔습니다. 모두 날것으로 올라왔죠.

뽕잎은 생각보다 부드러운데 참취는 생긴 것은 부드럽게 생겼는데 까실까실 합니다. 그리고 머위이파리는 곰취처럼 아쌀하고, 상추는 쫑이 서서 씁쓰름하고, 제주 더덕은 육지 것과는 달라서 싱겁고, 마늘쫑은 약이 올라서 그런지 맵네요.

불혹의 나이에 이 곳에 내려왔으니 저도 막막하더군요. 서울에서 그동안 다져왔던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때가 가장 힘들었는데 시골생활의 묘미를 하나 둘 알아가면서 그것들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적응 잘하는 것은 아시죠?

그런데 너무 적응을 잘했나요? 요즘은 몸만 시골에 살고 그 이전 서울생활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바쁜 생활들이 이어지고 있답니다. 이런 생활이 싫은데 그렇다고 나만 생각하고 살아갈 수 없는 일이잖아요.

이곳에 내려올 때는 40대 초반이니 무엇이든지 새로 시작하면 된다는 청년의 패기 같은 것이 있었는데 40 중반에 접어드니 이 곳에서 다져왔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또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도 듭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까지 잘 해왔잖아요.

어머니, 보리밭이 넘실거려요.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보리밭이 마치 초록물결이 일렁이는 듯 하고, 저 검은 돌담위로 넘칠 것만 같이 넘실거립니다.

어머니, 생각나세요? 보릿고개를 넘기던 시절 밀가루음식만 먹다가 어찌어찌 해서 쌀을 사오셨는데, 쌀밥만 해 먹으면 쌀이 금방 떨어지니 보리를 섞어 먹어야 했는데 보리를 살 돈이 없어서 흰쌀밥을 먹었죠. 그때 어머니의 심정, 그것이 이제야 와닿고 울컥거리는 것을 보니 중년이 되어서야 철이 들었나 봅니다.

어버이날이 되면 달아드리는 카네이션, 그것이 그냥 형식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버이날 다른 선물보다도 꽃 한 송이를 직접 달아드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효도인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어머니, 건강하세요. 제가 지금 드릴 수 있는 말, 어머니를 위한 기도는 그것밖에는 없답니다.

아이들도 다 건강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족하다고 자신할 수 없지만, 그 아이들의 마음만큼은 주름살 없이 키우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나도 도시생활을 하는 것보다 이곳 시골생활이 더 잘 맞는지 지난 시골생활을 하면서 7kg이나 몸무게가 늘어서 보기도 좋답니다. 한 3kg 더 불릴까 하다가 입던 옷들이 작아질 것 같아서 계속 그 몸무게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5월 말에 나올 동화책 한 권을 교정보고 있습니다. 이 책이 나오면 제일 먼저 어머니께 보내드리겠습니다. 어버이날 선물로 드렸으면 더 좋았을 것을 어머니 생신선물로 드리게 될 것 같습니다. 어머니 생신에는 아내가 서울에 갈 것입니다. 그때 아이들이 만든 카네이션과 제가 만든 책을 함께 보내드리겠습니다.

어머니, 그 때쯤이면 지금 넘실거리는 보리가 누렇게 익어 추수가 시작될 것 같습니다. 머지않아 어머니 곁에서 어버이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니, 내내 건강하세요. / 김민수 (오마이뉴스 기자)